B급 호러에 A급 말맛…김준수, 무대를 비틀다

유주현 2026. 1. 2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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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비틀쥬스’ [사진 CJ ENM]
왠지 모르게 대극장 뮤지컬 오프닝에 흔한 장례식 풍경. 한 소녀가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를 때 최고 스타 김준수가 갑자기 끼어든다. “누가 공연 시작부터 이런 발라드를 부르냐?” 특유의 앙칼진 발성에 시작부터 객석의 텐션이 급상승한다.
뮤지컬 '비틀쥬스' [사진 CJ ENM]

100억년 동안 이승과 저승 사이에 끼어있던 괴짜 유령이 ‘존재감 없음’을 견디다 못해 반란에 나서는 이야기, ‘비틀쥬스’가 돌아왔다. 2019년 제작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2021년 국내 초연됐지만, 팬데믹 시국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올겨울엔 존재감이 다르다. 김준수 반전 캐스팅과 ‘쥐롤라’ 패러디로 뮤지컬계 셀럽이 된 개그맨 이창호의 코미디 각색이 더해진 덕이다.

컬트 거장 팀 버튼 감독의 초기작인 동명 영화(1988)가 원전이다.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비틀쥬스가 갓 죽은 신혼부부 아담과 바바라, 엄마를 따라 죽고 싶은 소녀 리디아를 이용해 존재감을 얻으려고 벌이는 정신없는 소동극이 ‘버트네스크’라 불리는 팀 버튼 특유의 판타지 세계관으로 펼쳐지는데,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흘러넘치는 엉뚱한 상상력이 웬일인지 무대에서 더 자연스럽다. 88년엔 팀 버튼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구현할 수 있는 CG 기술이 없었기에 영화가 오히려 엉성한 소품과 모형으로 가득한 무대극과 같았기 때문이다.

뮤지컬 '비틀쥬스' [사진 CJ ENM]
무대를 닮은 영화가 실제 무대화될 때 관객이 기대하는 건 뭘까. ‘비틀쥬스’는 마니아 취향 컬트 영화를 대중적인 쇼뮤지컬로 진화시켰다. 놀이동산에 온 듯 현실과 환상의 시공간을 오가는 세트에서 마술과 퍼펫, 춤과 노래를 버라이어티하게 펼치며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다. 영화보다 훨씬 세련된 기술로 판타지를 구현하지만, 고전 영화의 조악한 특수효과를 오마주하듯 친근한 아날로그 터치다. 마치 어린 시절 손재주 좋은 반 친구가 방학숙제로 만들어온 근사한 집 모형 같은 무대에서 몹시 특이한 ‘가족 뮤지컬’이 펼쳐진다.
김준수
초록색 폭탄 머리에 과한 화장을 한 비틀쥬스의 정체는 일견 빌런이다. ‘비틀쥰수’라는 김준수의 연기 변신이 관전 포인트인데, 흔히 예상하는 ‘아이돌 출신’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캐릭터라서다. 트리플 캐스팅인 정성화·정원영만 해도 개성적인 코믹 연기에 특화된 배우들이다. ‘엘리자벳’의 토드,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같이 멋지게 각 잡는 전형적인 주인공 연기와 로맨틱한 사랑 노래에 익숙한 입장에선 비호감의 화신 ‘비틀쥰수’를 상상하기 어렵다.
뮤지컬 '비틀쥬스' [사진 CJ ENM]
그런데 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게 반전이다. 해골들이 단체로 춤추는 엽기 결혼식 등 군무 퍼포먼스를 센터에서 이끄는 탁월한 춤선에 전작 ‘알라딘’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는 이미 유머러스한 ‘깨발랄’ 연기로 스펙트럼을 넓혀왔고, 골수 팬덤을 넘어 대중에게 널리 소구하고 있었던 것. 더구나 이 공연의 ‘킥’으로 꼽히는 이창호 각색의 개그 감각과 걸쭉한 19금 농담 섞인 능글맞은 대사, 사이다 욕설까지 ‘말맛’을 찰지게 살려내니 객석은 시종 빵빵 터진다. 평소 이미지와의 괴리감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는 것도 웃음 포인트.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는 ‘투명한 존재’ 비틀쥬스를 자칭 “김준수 옆을 지나가는 네 남친 같은 존재”라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식이다.
뮤지컬 '비틀쥬스' [사진 CJ ENM]

극이 진행될수록 이런 찰떡 캐스팅이 또 없다 싶다.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우울한 소녀 리디아다. 죽은 엄마가 그리워 새 가정을 꾸리려는 아빠를 떠나 엄마에게 가려 하고, 비틀쥬스는 이 가족의 성장을 돕는 존재다. 동화가 사라진 세상에서 B급 호러로 ‘흑화한 피터팬’인 셈이다. 동심의 상징 피터팬이 영원히 늙지 않는 네버랜드로 웬디를 데려가듯, 이승과 저승 사이 ‘네더월드’로 리디아를 안내한다. 무릇 죽음을 통해 삶을 긍정하게 되고, 과거를 털어야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는 법.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싶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건 ‘아이돌’ 본연의 임무가 아니던가.

웃고 즐기다 보면 ‘뒤끝’도 좀 남는다. ‘100억년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한 낯설고 이상한 존재인 비틀쥬스의 이름을 세 번 불러주면 모두의 눈에 보이게 된다’는 설정은 단순한 유머 코드가 아니다. ‘가위손’ ‘유령신부’ 등 비정상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계관을 펼치며 비주류들의 영혼을 위로해 왔던 게 팀 버튼이다. 그 세계관의 시작인 ‘비틀쥬스’의 정체성에 늘 존재했으나 결코 주목받은 적 없었던 소수자들의 페이소스가 깃들어 있다. 그런데 1막 엔딩에서 “우리 다시는 투명해지지 말자”고 외치던 비틀쥬스가 2막에선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나 내 행복을 찾아 떠나겠다”며 쿨하게 사라진다. 모두가 김준수가 될 순 없지만, ‘김준수 옆을 지나가는 내 남친’도 스스로의 행복을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김준수의 입으로 하고 있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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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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