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백화된 산호, 들꽃…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되묻다
설치미술가 최재은 개인전 ‘약속’

“인류의 기원에 천착하는 작업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다시 묻는 태도에서 출발했습니다. 오늘의 인류가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 생명에 대한 책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윤리를 다시 사유하는 거죠.”
4월 5일까지 열리는 최재은 작가의 전시 명은 ‘약속’이다. ‘공생지약(共生之約)’이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문명 훨씬 이전부터 시공을 관통해온 인간과 자연의 상호 연대성을 되새기게 하는 개념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본래부터 존재하던 내재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자연과 인간은 처음부터 분리된 적이 없었죠. 우리는 그 관계 안에서 태어났고, 살아왔으며, 돌아갑니다. 그러나 문명은 그 관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약속’은 그 단절 이후에 다시 기억해야 하는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조각·영상·설치·건축 등 다양한 매체와 영역을 아우르는 최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꾸준히 조명해왔다. 특히 이번 전시는 백화된 산호, 아무도 돌보지 않는 DMZ의 생명들, 이름조차 불린 적 없이 사라지는 들꽃 등 소멸하는 생태계를 통해 자연과 생명의 파괴 앞에 놓인 인간의 책임과 공생의 기능을 환기 시킨다.
“저의 작업은 자연을 보호하자는 선언이나 경고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이미 소멸되고 있거나 소멸의 과정에 놓인 생태의 흔적을 그대로 마주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죠. 자연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외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시는 ‘루시’ ‘경종(警鐘)’ ‘소우주’ ‘미명(微名)’ ‘자연국가’라는 총 5개의 소주제 공간으로 구성됐다. ‘경종’ 공간에선 실시간 해수면 온도 데이터와 바다 이미지를 결합한 영상 작업 ‘대답 없는 지평’ 연작을 통해 기후 위기, 생태 파괴의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일본 오키나와 해수의 이상 고온으로 하얗게 변해버린 산호는 처연하다.
‘소우주’ 공간에선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최 작가는 1986년 경주 토함산 자락에서 시작해 일본·미국·유럽·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땅속에 종이를 묻어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흐른 뒤 꺼내는 프로젝트로 각각의 종이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흙의 시간이 묻어난다. 작가는 “지구가 오랫동안 써내려 온 편지를 잠시 빌려 읽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집 앞 산책길에서 만난 들꽃의 이름을 찾아주는 작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사진 이치카와 야스시]](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4/joongangsunday/20260124012347243zfsd.jpg)
‘자연국가’ 공간에선 DMZ를 인간의 분단 경계가 아닌,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재사유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최 작가는 친구인 건축가 반 시게루 등과 함께 2014년부터 철원지역 DMZ 안에 남북을 공중으로 연결하는 보행로를 만들고, 보행로 중간 중간에 공중정원과 정자·타워를 설치하고 철원 제4터널 내부에 종자와 지식 저장소 등을 마련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DMZ는 정치적 갈등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70여 년 동안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되며 수많은 생명들이 스스로의 질서로 자리 잡아온 특별한 생태의 장소죠.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는 명확한 종료 조건이 없습니다. 숲이 완전히 복원되면 끝난다거나, 어떤 수치를 달성하면 종료되는 방식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를 ‘문제’가 아니라 ‘책임’으로 인식하게 되는가가 중요하죠. 국가와 이념을 넘어,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카이브’ 공간에는 최 작가의 주요 야외 조형물인 합천 해인사 소재의 성철스님 사리탑 ‘선의 공간’, 서울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앞 ‘시간의 방향’ 등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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