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빛깔 알싸함…한겨울에 만난 봄

2026. 1. 24. 01: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상현의 ‘찰나의 맛’
노지 재배하는 부추는 봄부터 가을까지가 제철이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부추는 지금부터 제철이다. [사진 박상현]
예로부터 서울은 소뼈를 우려낸 설렁탕을 즐겨 먹었고, 부산은 돼지뼈를 우려낸 돼지국밥을 즐겨 먹었다. 서울의 설렁탕과 부산의 돼지국밥은 주재료가 소냐 돼지냐 만큼이나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설렁탕에는 고명으로 대파를 올리고 돼지국밥에는 부추를 올린다. 서울의 설렁탕집은 대파 인심이 정말 후하다. 손님이 원하는 만큼 넣어주거나, 아예 알아서 덜어 먹으라고 대파가 듬뿍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두기도 한다. 설렁탕 먹으러 가서 파국을 드시는 분들도 더러 있을 정도다. 그에 비해 부산의 설렁탕집은 대파 인심이 참 야박하다. 행여 서울 사람이 부산서 설렁탕을 먹으면 대파 때문에 마음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추에 있어서 만큼은 상황이 역전된다. 부산 돼지국밥집의 부추 인심은 서울 설렁탕집 대파 인심 못지않다. 아니, 돼지국밥집에서 부추를 아낀다는 건 국밥 장사를 접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지 부추는 봄부터 가을까지가 제철
사실 대파와 부추는 그 근원을 따져보면 같은 백합과 식물이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향신채소는 대부분 식용 백합과에 속한다. 양파·대파·쪽파·부추·마늘·달래 등이다. 따라서 설렁탕에 부추를, 돼지국밥에 대파를 고명으로 올린다 한들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사람이 음식을 먹는 방식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감성보다는 습관이 지배한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굳어진 전통이 음식에서 지역성을 형성한다.

내가 단골로 다니는 부산의 돼지국밥집에는 계절이 두 가지밖에 없다. 돼지국밥에 김치가 전부인 차림에 ‘무슨 계절이 있을까’ 싶은데 분명한 차이가 있다. 돼지국밥에 반드시 곁들여야 할 부추무침의 유무다.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는 부추가 나오지만, 겨울 한 철에는 봄동 무침이 나온다. 겨울에 생산되는 부추는 가격이 비싸 상대적으로 저렴한 봄동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에 익숙해진 단골들은 봄동이 식탁에 올라오는 순간부터 ‘겨울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하고, 부추가 올라오는 순간이 되면 ‘비로소 봄이 왔구나’ 반가워한다.

부추는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함께해 왔고 덕분에 지역별로 다양한 부추가 자생한다.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게 개량된 덕분에 맛과 향 그리고 모양도 조금씩 다르다. 지역별로 부추를 부르는 명칭도 다채롭다. 수도권에서는 ‘부추’, 영남권에서는 ‘정구지’, 호남권에서는 ‘솔’, 충청권에서는 ‘졸’, 제주도에서는 ‘세우리’라 부른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행정통합의 권역을 부추 명칭을 기준으로 나눠도 될 정도다.

실제로 부추를 생산하는 지역도 전국에 퍼져 있다. 지역별로 대표적인 부추 생산지는 경기도 양평군·양주시·평택시·파주시, 충남 부여군과 서천군, 충북 청주시, 경북 포항시와 경주시, 경남 하동군과 함안군, 울산광역시 북구 등이다. 부추는 다양한 품종이 있지만 크게 보면 잎이 넓은 대엽종과 입이 가는 소엽종으로 나뉜다. 대엽종은 흔히 생각하는 부추고, 소엽종은 영양부추·솔부추 등으로 불리는 잎이 매우 얇고 가느다란 부추다.

경상도선 봄에 첫 수확한 부추 귀히 여겨
자연 상태의 부추는 겨우내 땅속에서 줄기와 뿌리로 버티고 봄이 되면 잎이 자란다. 이때부터 잎을 갈무리하면 가을까지 서너 번은 더 수확할 수 있다. 경상도에서는 봄에 처음 갈무리하는 부추를 ‘아시정구지(첫물부추)’라고 해서 특히 귀하게 여긴다. 차가운 겨울을 버텨낸 강인함이 맛과 향으로 농축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름에 피는 부추꽃은 관상용으로도 좋지만 숨은 기능이 하나 더 있다. 꽃에도 부추 특유의 향과 알싸한 매운맛이 은근히 남아 있다. 그래서 부추꽃도 다양한 고명으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생선회를 먹을 때 간장에 고추냉이 대신 부추꽃을 곁들이면 시각적으로도 이쁘고 고추냉이 대체재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럼 이쯤에서 겨울 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정월도 한참 남았는데 왜 제철 식재료로 부추를 추천하는지 밝혀야겠다.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 재배가 일반화되면서 땅에서 나는 식재료의 계절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다고 한탄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노지에서 재배하는 부추는 봄부터 가을까지가 제철이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부추는 지금부터 제철이다.

부추 수확이 한창인 경남 하동군 옥종면의 부추 하우스. [사진 박상현]
한겨울인데 부추 수확이 한창인 경남 하동군 옥종면을 찾았다. 옥종면은 경남 최대의 부추 산지다. 바깥은 영하의 기온인데 하우스 안은 봄 날씨처럼 포근했다. 온통 초록 잎으로 물든 풍경은 겨울 속 봄이 분명했다. 잎이 넓은 대엽종인 옥종면의 부추는 지리산 자락의 비옥한 토지에 미생물을 활용한 자연 농법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알싸한 향과 부드러운 식감이 제철 노지 재배 부추 못지않다. 마을 주민들은 다음날 가락동 농산물도매시장에서 경매할 물량을 맞추기 위해 부추 수확에 여념이 없었다. 이맘때 수확한 옥종면의 부추는 가락동 농산물도매시장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잠시 일을 멈추고 먹는 부추비빔밥은 꿀맛이다. [사진 박상현]
일손을 조금 보태고 현지에서 즐겨 먹는다는 부추비빔밥 한 그릇을 대접받았다. 재료라 해봐야 갓 수확한 부추와 부추를 잘게 다져 넣은 양념장이 전부. 그런데 너무 꿀맛이라 순식간에 비웠다. 무엇보다 입안 가득 퍼지는 알싸한 향과 맛이 계절을 잊게 했다. 늘 조연이나 단역으로 머물던 부추도 당당히 주연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부추 한 단이면,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을 당겨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음식의 탄생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 많은 맛칼럼니스트다. 현재 사단법인 부산로컬푸드랩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