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도 트럼프도 우리의 일상을 막을 순 없어”
“트럼프 떠들어대니 피곤하지만
그냥 어제처럼 계속 살아갈 뿐”

북위 64도. 세계 최북단 수도 그린란드 누크에서 겨울철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각은 오전 10시다. 11시는 돼야 해가 완전히 떠서 밝아진다. 대부분 관공서나 상점이 문을 여는 시각도 이때다. 기자가 처음 그린란드에 도착한 지난 20일 최저기온은 영하 15도. 심한 바람에 한때 체감 온도는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졌지만 이내 기온이 영상으로 올랐다. 길을 지나던 주민은 “올 겨울 가장 따뜻한 날씨다. 트럼프처럼 날씨도 변덕이 심하다”며 웃었다.
인구 2만명이 사는 누크 시내는 한국의 읍(邑) 정도 크기로 10~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지난 3일간 누크 곳곳을 돌며 그린란드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접했다. 세계 초강대국 대통령의 영토·주권 위협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도 이들은 생활인으로서 삶의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그린란드를 ‘얼음 한 조각’(a piece of ice)이라고 부르지만, 이누이트족 아컬룩(30)은 “트럼프는 우리 땅이 (미 본토에서 가장 큰 주인) 텍사스의 3배가 넘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그린란드는 한반도의 10배 크기다.

◇“무상교육·무상의료, 美보다 복지 좋아… 우린 충분히 잘 살고 있다"
IT기업에서 근무하는 카트리네 크리스토퍼센(26)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는 한국어를 하며 기자에게 다가왔다. BTS의 팬으로 수년 전 서울을 방문해 한 달 머무른 적도 있다는 크리스토퍼센은 “누크에 있는 유일 대학 그린란드 대학은 물론, 덴마크 본토 학비도 완전 무료”라며 “복지 혜택에 사람들은 생활에 만족해한다. 우린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가 돈과 무력을 언급할 때마다 현지인들은 ‘그래서 어쩌라고(so what?)’라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누크에선 빙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치며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도 자주 보였다. 그린란드의 중위연령은 34세로 덴마크(42세), 한국(46세)보다 젊다. 합계출산율은 1.8명대로 유럽 최상위권이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몰려다니는 모습이 한국의 1980~90년대를 연상케 했다. ‘그린란드는 물건이 아니다’ 간판을 찍는 기자 옆에 아이들이 몰려와 “헬로”라며 인사하기도 했다.
유모차를 끄는 한 어머니에게 다가가 현 상황에 대해 묻자 “그린란드가 미국이 되면 교육비랑 의료비는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했다. 그린란드 1인당 국민소득은 5만7000달러로,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가 제공된다. 연간 9000억원에 달하는 덴마크의 보조금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이지만 삶의 질 측면에서 별로 아쉬울 게 없다는 얘기다. 한 주민은 “‘미국은 의료비를, 그린란드는 오이값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다”며 “오이값을 걱정하는 게 훨씬 낫다. 미국 앞에서 우린 당당하다”고 했다.
덴마크어로 ‘판자’를 뜻하는 ‘브레테트(Brættet)’는 그린란드 마을 곳곳에 있는 육류·어류 직판장이다. 누크 시내 중심 브레테트에 들어서자 고래고기로 보이는 검붉은 덩어리를 해체하는 작업자들의 손짓이 분주했다. 도마 한 켠엔 이미 도축돼 해체를 기다리는 바다오리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촬영을 하려하자 40대 이누이트 남성 작업자는 “노 포토”라며 제지했다.
이곳에선 각종 어류뿐 아니라 물개·바다표범·순록 고기도 손질해 판매한다. 브레테트 내부 촬영은 동물 보호 윤리 논란 등을 우려해 엄격히 금지돼 있다고 한다. 한 남성은 최근 그린란드에 대한 외부 관심이 달갑지 않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얼음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린란드 산업에서 수산물 수출 및 가공이 차지하는 비율은 98%에 달한다.



수천년 전통 이누이트 수렵 문화를 보여주는 브레테트에서 불과 50m 거리에 10층짜리 초현대식 쇼핑몰 ‘누크센터’가 있다. 유리로 마감된 겉모습이 한국의 여느 빌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부엔 방한 의류·신발, 전자제품, 장난감, 생활용품, 보석 매장과 카페 등이 늘어서 있었다.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마트도 있었다. 물가는 서유럽보다 약간 비쌌다. 제로콜라 500ml에 15덴마크크로네(3500원), 달걀 12개에 38크로네(9000원), 대파 두 개에 12크로네(3700원), 사과 8개에 29크로네(6700원) 정도였다. 소고기·와인은 한국보다 2~3배 비싸고, 비교적 생선·맥주가 쌌다.
시내 곳곳에 40곳가량 숙박업소가 있다. 북미와 덴마크 등에서 연간 관광객이 20만명쯤 온다. 호텔은 10곳, 이 중 4성급은 7곳이다. 세계 각국 취재진이 몰리면서 시내 주요 호텔은 지난 20일을 기점으로 대부분 빈 방이 사라졌다. 기자가 머무는 숙소도 22일부터 미국·영국·스위스 기자 등이 몰려와 만실이 됐다. 기자실과 숙소 등에서 만난 각국 기자들은 인종·국적·나이·성별을 초월해 반(反) 트럼프 정서를 공유했다. 캐나다의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마크 콜리스(35)는 “트럼프가 좀 미치긴 했지(a kind of crazy)”라는 동료들 말에 정색하며 “아니, 완전히(absolutely) 미쳤지”라고 했다. 캐나다는 지난해 미국과의 관세 전쟁 후 최근 트럼프의 영토 병합 발언까지 논란이 되며 반미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다. 콜리스는 “트럼프는 정치를 저질 코미디쇼로 만드는 아주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영국 인디펜던트 소속 애나벨 그로스먼 기자는 22일 오전 본지 기자를 보고 안도하더니 “촬영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 마이크를 잡고 녹화 중계를 해야 하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를 잡아줄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고 했다. 여행 전문 기자인 그는 “어제 런던에서 누크로 급하게 날아왔다”며 “트럼프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겨울철 누크의 해는 오후 4시 30분이면 진다. 낮 5시간, 밤 19시간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밤에 무엇을 하며 지낼까. 테이크아웃 전문 음식점인 ‘니니 테이크어웨이’를 운영하는 나린(40)은 “이곳 사람들은 저녁에 주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피자·햄버거·치킨에 더해 태국 음식 등까지 취급하는 그린란드판 ‘김밥천국’ 같은 식당이었다. 건설 현장 작업자, 운전 기사 등으로 보이는 남성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와 주문을 했다. 그는 하루 100~200명 손님을 받기 때문에 트럼프발 위기 속에서도 “일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린란드 사람들은 대부분 스포츠를 좋아했다. 누크 공항에서 시내까지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남성도 있었고, 심지어 눈이 쌓여 단단해진 거리에서 운동화 차림으로 러닝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편의점 직원 조이(41)는 “우린 운동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디질 못한다”며 “사람들이 밤에 할 게 없다 보니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는 게 평생의 낙이고 나도 그렇다”고 했다.

누크 시내엔 헬스장 5곳이 있다. 연중무휴 운영하는 ‘피트니스GL’의 1개월 회원권은 499크로네(11만5000원). 오후 6시에 이곳에 들어서니 민소매·반팔 차림의 남녀가 가득 차 운동에 여념이 없었다. 난방은 주로 전기를 사용하는데 그린란드 전기의 70~80%가 수력발전으로 생산된다.
헬스장 직원 뵈르게 카를센(23)에게 ‘헬스장 회원이 몇 명이냐’고 묻자 회원 관리 전산 화면을 보여줬는데, 누적 회원번호가 ’17828′이었다. 누크 주민 대부분이 한 번쯤은 가입 경험이 있다는 의미다. 카를센은 “우리가 미국에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미국 대통령이 매일 ‘가져가겠다’고 떠들어대니 피곤하다”면서도 “어쩌겠나. 우린 그냥 어제처럼 계속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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