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사람 분리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윤지원 2026. 1. 24.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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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80년사
강창일 지음
한울아카데미

지난해 ‘해방 80년’과 ‘수교 60주년’이라는 역사적 분기점을 지난 한·일 관계는 그간 한국 정치에서 가장 예민한 뇌관이었다. 새로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지금, 4선 의원을 거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주일 대사를 지낸 ‘일본통’ 강창일 전 대사가 그 굴곡의 역사를 집대성해 신간 『한·일 관계 80년사』을 펴냈다. 지은이 강 전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24년 동국대학교에서 진행했던 강의를 지난 1년 간 시간을 쏟아 책으로 압축했다”라며 “역사적 과오에 대한 냉철한 관점과 경제·안보를 위한 협력의 필요성은 이제 마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담았다”라고 밝혔다.

1996년 ‘2002년 월드컵 한·일 우호협력’ 축구공을 교환하는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중앙포토]
정권의 성향에 따라 냉·온탕을 오갔던 대일 외교의 궤적을 비판적으로 담은 이 책의 차별점은 이승만부터 윤석열 정권까지 총 열 차례의 정권 교체와 일본 내각의 파벌 변동이 시시각각 맞물려 관계를 요동시킨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기했다는 점이다. 기존 관련 서적들이 피해와 가해, 혹은 갈등과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치중해 온 것과 궤를 달리하는 대목이다. 우선 지은이는 1965년 한·일 협정을 냉전 구도 속에서 양국 집권층이 각자의 이해를 맞교환한 ‘전략적 야합’이라고 규정했다. 경제 재건의 종잣돈을 확보한 공(功)만큼이나, 과거사 청구권을 모호한 외교 문법 속에 유예시킨 과(過)가 오늘날 양국 관계를 흔드는 구조적 결함이 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중앙포토]
특히 지은이의 시선은 문재인 정부의 ‘원칙론’과 아베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경제 보복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지점에 머문다. 위안부와 강제 동원 배상 문제로 파열음이 거셌던 양국 관계는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발표로 돌이킬 수 없이 악화했다. 지은이는 이를 ‘대일본 제국’ 부활을 지향한 아베 신조 정권과 ‘투트랙 외교’를 실천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실책이 맞물린 비극으로 규정한다.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2021년, 그는 주일 대사로 발탁됐다. 당시 청와대 노영민 비서실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자 “나는 문 대통령의 원칙론 기조와 맞지 않는 실용주의자임을 알지 않느냐”라며 당혹감을 표했다고 한다. 그의 발탁은 그만큼 문재인 정부 대일 외교의 ‘출구 전략’ 성격이 짙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중앙포토]
현장에서 겪은 외교 비사들은 역사서라는 장르의 무게를 덜어내는 요소다. 주일본 대사 시절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 등 당국자들로부터 겪은 홀대와 달리, 아소 다로 전 총리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환송식을 열어준 대목은 그의 두터운 지일(知日) 인맥을 실감케 한다. 일본 당국자들의 결례에 대해 “치졸하고 협량하다고 웃어버렸다”고 비판하는 대목은 호쾌하기까지 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6월 조기 귀국 요청을 받은 일화도 흥미롭다.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이 방일을 앞두고 지은이와의 동행을 껄끄러워해 조기 이임 결정이 내려졌다는 진상을 알게 되자 그는 “헛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고 책에 적었다. 지은이는 특히 윤석열 정부의 정책에 대해 한·미·일 안보협력이라는 명분 아래 과거사를 성급히 봉합하려 한 ‘굴종 외교’라고 냉담한 평가를 내렸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 [청와대사진기자단]
그가 제안하는 미래지향적 양국 관계의 종착지는 ‘국가와 사람의 분리’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과오는 따지되, 개개인을 향한 혐오는 멈춰야 한다는 주문이다. 과거사의 실타래는 민간의 연대로 풀어가되, 국가 차원에서는 한·중·일 협력을 통해 외교적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의 신간인 이 책은 한·일 관계의 새로운 60년이 나아가야 할 좌표를 가리킨다.

그의 비판적 성찰은 책 밖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강 전 대사는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상대로 “주변의 감정적 반일주의자들을 캠프에 들이지 마시라”는 고언을 전했다고 한다. 그가 당시 우려를 표하며 구체적으로 거명했던 인물들은 실제로 이재명 정권 출범 초기에 나돌았던 숱한 하마평이 무색하게도 아직 쓰임이 없다. 현재 그는 한·일 포럼의 한국 측 회장으로 한·일 우호 증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일 포럼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발족한 양국 간 민간 고위급 대화 채널이다.

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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