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은 남성…부조리한 의학계 관성

엘리자베스 코멘 지음
김희정·이지은 옮김
생각의힘
질병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일과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지향점이 다르다. 전자가 보편성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구체적 사건에 주목한다. 좋은 의료는 두 축이 함께 굴러갈 때 진전한다. 문제는 둘 다 완벽하게 해내기에는 요원한 일이고, 어디에 더 무게를 둘 지는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현대 생물학의 상식을 반추하면, 의료는 여성의 신체와 여성에게 나타나는 질병 양상을 기준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생각도 든다. 포유동물이 공유하는 특성은 물론, 호모사피엔스에서 발현되는 특징들이 여성의 몸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중세는 차치하더라도, 나름 ‘객관적’이라고 자부한 근대 의학조차 그렇지 못했다. ‘정상’의 기준을 정하고 연구와 치료의 시선을 장악한 것은 거의 전부 중상위 계층 남성이었다. 그 결과 여성의 통증은 과장으로, 복합 증상은 불안으로, 의료진이 파악하지 못한 감각은 멋대로 쓸데없이 상상해낸 “머릿속 문제”로 치부된 오랜 습관이 현대 의학에도 남아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방암 전문의가 쓴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은 “여성의 증상은 과장이고 불안이며 결국 머릿속 문제”라는 오래된 의료적 관성을 해부한다. 책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주치의인 그에게 “땀을 묻혀 죄송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저자의 경험은 여성들이 아픔 자체보다 ‘폐를 끼치는 것’을 먼저 걱정하도록 길들여져 왔음을 상징한다. 저자는 이런 사과의 문화가 개인 성향이 아니라, 근현대 의료 체계가 여성의 몸을 과소평가해 온 바가 축적된 결과라고 말한다.
여성의 몸에 대해 초기 의학이 남긴 오해와 그 잔재가 오늘날 진단과 치료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추적하는 이 책의 장점은 성별 격차의 원인을 ‘성’이나 ‘호르몬’ 같은 단일 변수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신체의 여러 부위와 증상군을 따라가며, 여성 환자가 겪는 “무시됨”이 얼마나 다층적인지 보여준다. 피부, 골격, 근육, 혈액, 호흡, 장, 방광, 면역, 신경, 호르몬 그리고 생식 등 11개 분야를 망라한다.
이런 접근법은 많은 정보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남녀는 원래 다르다”는 진부한 명제로 빠지지 않고, 실제 임상에서 무엇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피부에 와 닿게 전달한다. 심장질환 진단이 남성 모델을 표준으로 삼아 여성 증상을 “비전형”으로 취급해 왔다는 서술은, 차별이 감정이 아니라 규격과 언어의 문제라는 점을 선명하게 한다. 과거부터 폐암 표준환자 모델로 흡연이력이 있는 중장년 남성을 설정해왔지만, 이제는 여성 폐암 환자가 더 많다는 점도 놀랍다.
다만 그 강점이 아쉬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각 장이 전개될수록 독자는 “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단정적 진술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임상의인 저자는 자신이 듣고 겪은 사례들을 넓게 펼쳐 보이며 공통된 패턴을 축적하는 방식에 머문다. 현재의 구조적 부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이게’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것을 설계 수준에서 어떻게 고칠지에 대한 처방-연구 설계의 전환, 임상 가이드라인의 수정, 인센티브 구조의 재편-보다는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자는 호소에 중점이 놓인다.
어쩌면 그조차 근본적 해결책을 논할 여유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책을 쓰는 도중 비교적 가벼운 척추 수술을 받았고, 얼마 뒤 참석한 파티에서 심한 두통을 겪었다고 한다. 자신의 병력과 증상을 종합해 뇌척수액 누출을 의심했지만, 유명한 남성 성형외과 의사가 옆에서 몇 마디 듣고 단언한 오진 앞에서 오히려 자기 판단이 흔들렸다고 고백한다. 뿌리 깊은 병폐는 무엇보다 먼저 병폐로 인식된 이후에야 해결책을 논할 수 있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지난해 대한성차의과학회가 출범했다고 한다.
이관수 과학저술가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