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이전 '중'항해시대, 중심엔 정크선단 있었다

2026. 1. 2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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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형의 해양시대
2005년 중국 난징의 명나라 황실조선소 유적지 내에 복원된 정화 함대의 중심 선박 보선(寶船). 길이가 150m에 달했다. 환관 출신인 정화가 영락제의 명령을 받고 62척의 선단을 이끌고 해양 원정에 나선 지 600년을 기념해 건조됐다. 정화 함대는 1433년까지 7차례 원정을 나섰다. [중앙포토]
오늘날 세계사를 떠올릴 때 해양 교역과 세계화의 시작을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다. 과거 아시아 바다는 글로벌 교역망이 활발히 움직이는 교류의 공간이었다.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가 대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중국-한반도-일본-동남아-인도양으로 연결된 아시아 바다는 이미 넓은 해상 무역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해상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역이 아니라 기술과 종교·문화·인구 이동을 수반하는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로 15세기 후반 유럽의 대항해 시대 전까지 번성했다.

해상 실크로드는 단일한 항로를 넘어 여러 해역이 연결된 다층 구조의 교역망으로 동남아시아-인도양-이슬람으로 연결된 ‘질서 있는 바다’를 만들었다. 이 질서 속에서 무역은 군사력과 분리되지 않았다. 강력한 해군력은 상선을 보호하고 해적을 제압하는 통제력을 유지했다. 외교와 교역을 결합한 국가 전략이 함께 작동되는 해상 실크로드는 경제·군사·외교가 결합된 해양 통제 구조였다. 해상 실크로드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앞선 과학·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축적된 해양 기술과 데이터, 고도화된 선박 기술과 항해술 덕분이었다.

설계·제작·운송 분업화, 단기간 수백 척 건조
그래픽=정수경 기자
15세기 중국은 세계 최대의 조선 국가였다.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 함대는 동남아·인도·아라비아·동아프리카까지 7차례 항해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수백 척의 선박과 수만 명의 인원이 포함된 규모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과거에 없었던 대규모 해양 원정작전이었다. 이 원양 활동은 단순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선박 건조 능력과 기술, 물류 시스템이 이미 성숙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은 조선소·물자·인력의 삼각 구조를 기반으로 국가 조선 체계를 구축했다. 주요 하천과 연안에 대규모 국영 조선소를 운영했다.

난징 용강조선소는 정화 함대의 핵심 건조 기지 역할을 담당하고 푸젠·저장·광둥 연안에서는 상선과 군함이 건조되었다. 장강 유역에서는 국토 내부 뱃길을 위한 수송선과 대형 선체가 제작되었다. 이 조선소들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라, 선박 설계, 목재 가공과 조립, 검사와 보수까지 담당하는 종합 해양 공업 시스템이었다.

효율적인 전문 인력과 분업 시스템을 적용하여 목수, 선체 설계자 등 조선 전문가, 돛과 로프, 닻 등을 만드는 전문 제작공 그리고 항해 장비 담당자는 키와 나침반, 방수 구조를 담당하였다. 대형 선박 건조에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했지만 모든 선박 건조는 중앙정부가 벌목과 운송, 가공을 일괄 통제하여 단기간에 수백 척을 건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현대식 조선 분업 구조시스템의 원형이 이미 중국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중국의 전통 선박 정크선은 고대 한나라 시대부터 19세기 청나라 시대까지 동아시아 해상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의 정크선은 강에서 주로 운행되었지만 15세기에 들어 보다 많은 물품 적재를 위해 대형화되어 화물과 병력을 동시에 수송할 수 있었다. 상선과 군함 기능이 결합한 정크선은 강과 연안, 외해에서 모두 운항 가능한 다목적 선박이었다.

이후 정크선은 점점 발전되어 길이가 약 30~60m(대형은 70m 이상으로 추정), 배수톤수 약 400~1500t(대형은 그 이상으로 추정) 정도였다. 10~18세기에 사용된 대형 정크선은 600~2000t에 달했으며 짐을 싣고 내리는 기중기와 작은 배가 탑재되어 원정 무역에 최적화되었다. 승조원 수는 약 100~200여 명이었다.

정크선의 큰 특징은 선체에 수밀격벽(Watertight Bulkheads)을 적용한 것이다. 선체 내부를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 방수 칸막이를 설치하고 선체 외부를 이중 격벽 구조로 만들어 선체 일부분이 파손되어도 물이 쉽게 차지 않게 만들어 침몰 위험을 낮추고 선박의 생존성을 강화시킨 것이다. 또한 선체 중앙에 대형 키와 조정 시스템을 장착하여 크고 무거운 배도 비교적 정밀한 조종이 가능하게 하여 원양 항해의 안전성을 향상시켰다.

바람 방향 변화에 따른 유연한 대응을 위해 돛 사이에 대나무 활대를 넣어 소수의 인원으로도 돛을 접거나 펼칠 수 있었고 바람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조종성이 우수했다. 평평한 바닥은 얕은 해안이나 강에서 운항하기 편리했으며 화물도 많이 실을 수 있었다. 선체는 철제 못과 클램프(보강재)를 사용하여 건조하였다.

이에 비해 당시 유럽의 대항해 시대 초 주요 선박인 카락(Carrack)은 길이 약 35~45m, 톤수 300~800t 정도였다. 장거리 항해에 유리한 안정성과 조정성, 기동성을 갖춘 수송 중심의 선박이었다. 15세기 말에 등장한 갈레온(Galleon)은 길이 약 35~50m, 톤수는 500~1220t 정도였다. 화포 운용을 전제로 수송과 전투를 겸비한 플랫폼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단일 선체 구조로 선박 침수 시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다. 반면 정크선의 이중 선체 구조는 선박의 생존성 면에서 혁신적으로 앞선 기술이었다. 유럽은 18세기 이후에 비로소 이러한 선체 구조를 도입하였다. 15세기 기준으로 선박의 크기와 톤수, 안정성 등을 고려해 보면 해양 기술과 조선 능력은 유럽에 비해 중국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1415년 정화가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중앙포토]
중국이 아시아 바다를 누비던 최고의 절정기는 정화 함대의 대원정 시기였다. ‘정화의 대원정(1405~1433)’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해양 진출로 꼽히는 사건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동아시아 대륙의 거대 제국이자 패권국가였다. 명나라는 정화 대원정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해양 제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중국이 발전된 항해 기술과 선박 건조 능력으로 강력한 해양국가였다는 것을 보여준 엄청난 사건이었다.

명나라 건국 초기 중국 황제는 안으로 절대주의적 황제체제를 굳건히 하고 밖으로는 명나라 위엄을 확고히 세운다는 정책을 펼쳤다. 영락제는 몽골고원과 베트남을 평정하고 아시아 각지에 환관을 파견하여 군사와 외교를 통해 제국의 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환관 정화의 대원정도 이러한 대외 전략의 하나라 볼 수 있다. 총 7차례에 걸친 정화 함대의 원정은 연 2만7000명, 총 18만5000㎞에 달하는 거리를 항해한 세계적인 대 사건이었다. 60여 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정도의 다양한 규모의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정화가 타고 다닌 선박, 일명 보선(보물을 가지고 다니는 배)은 길이 150m, 폭 60m에 달하는 크기로 당시에 규모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세계 최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평가된다.

정화 함대는 말로는 교역 선단이었지만 때로는 강력한 무력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를 굴복시켜 조공국으로 만들어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고도의 외교술을 펼치며 아시아에서 일종의 해양 제국주의를 만들었다.

유럽, 18세기 이후에야 정크선 방식 도입
영락제 사후 1433년 정화 함대는 7차 원정을 끝으로 돌연 항해를 중단하고 중국은 해양 진출을 포기했다. 대규모 함대 유지와 원정 비용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으며 가져오는 조공품에 비해 지출이 너무 컸다는 이유다. 정치적으로 원정을 주도한 환관 세력에 반대하던 유교적 관료(문신)들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채택했다. 아울러 북방 민족의 위협이 커지면서 국방의 중심이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바다를 완전히 봉쇄한 해금 정책은 심지어 건조했던 대형 보선들을 파괴하고 원정 항해 기록과 지도(항해도)조차 파기시켜 상당 기간 부활할 수 있는 불씨마저 제거해 버렸다. 민간의 바다 진출마저도 엄격히 금지한 정책은 중국을 대륙 중심의 폐쇄적인 국가로 변모시켰다. 중국의 해양 전략의 포기는 막대한 기술과 능력을 ‘잠재력’으로 남겨둔 채 역사 무대에서 퇴장을 의미했다. 이후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 해양 질서와 경제 패권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이 세계 역사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 것은 유럽의 뛰어난 항해술과 선박 기술의 혁명이 아니라 한때 세계 최고의 선박 기술과 최대의 선단, 항해술을 가진 중국이 바다를 포기한 정치적 결정의 결과였다.

김진형 전 해군 제독. 해사 36기로 미국 육군 화학전학교 초급장교과정과 해군전쟁대학 지휘관 과정을 마쳤다. 합참 전략기획부장, 제1함대 사령관, 청와대 국가위기관리 센터장(비서관), 구축함(문무대왕함)과 초계함(제천함) 함장을 지냈다. 전 피지 및 남태평양5개국 대사. 저서론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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