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끼도 먹는 못생긴 뚱보왕이 나라고?”…호쾌한 王조롱, 난리난 나라[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오노레 도미에 편]

이원율 2026. 1. 2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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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오노레 도미에
야성과 연민을 함께 갖춘 시대의 고발자
왕과 귀족은 분통 서민은 속시원한 쾌감
‘억강부약’…손 끝 날카롭고도 따뜻했다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일부 확대), 1831, 석판화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문제의 ‘그 그림’?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오노레 도미에, 지금이 몇 시입니까, 1839
혹시
오노레 도미에 씨가 맞습니까?
경관이 물었다. “예.” 오노레 도미에가 답했다. “당신이 그 화가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만.” “잠깐 저희와 동행하시지요.” 경관이 표정을 바꿨다. 동료 경관과 함께 곧 포박할 듯 바짝 붙었다. “왜 이러시죠?” 도미에는 뒤로 물러섰다.
도미에 씨.

그런 그림을 온 도시에 뿌리고도
탈이 없을 줄 알았습니까?
경관이 따지듯 물었다. “생각보다 일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당장은 순순히 조사받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 그림’…? 도미에는 움찔했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얼마 전 선보인 야심작, <가르강튀아>. 경관이 말하는 그런 그림은 이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거인왕의 놀라운 정체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1831, 석판화

가르강튀아는 소설가 프랑수아 라블레가 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속 등장인물이다.

식탐 많은, 올바른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우스꽝스러운 면만 보이기 일쑤인 거인 왕이었다.

도미에가 화폭에 그를 그렸다.

문제의 그림을 보면, 가르강튀아는 입을 쩍 벌린 채 무언가를 빨아들인다. 그가 집어삼키고 있는 건 무엇인가. 사람들이 등에 이고 오는 재물이다.

이런 인간들이 줄줄이 선 판자 아래 상황도 심상찮다.

뚱보 관리가 입구에서 히죽댄다. 비쩍 마른 남자는 이 배불뚝이의 바구니 밑으로 동전을 뿌린다. 허름한 차림새의 서민은 뒤에도 빼곡하다. 한 여인은 서 있을 힘도 없는 듯 바닥에 앉아 있다. 그들은 지금 돈을, 정확히는 세금을 ‘뜯기고’ 있다. 배나온 관리는 바구니가 차는 대로 나무판 위에 따라 올라설 터였다. 서민의 억울한 눈빛?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1831, 석판화

기묘한 무리는 경사로 바로 아래에도 있다.

차려입은 이들은 고개를 들고 위로 손을 뻗는다. 가득 채운 등짐에서 어쩌다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상한 장면은 또 있다. 왕의 의자 밑이다. 귀족들이 환호한다. 이들이 보는 건 엉덩이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다. 그것은 문서 더미다. 잔뜩 삼킨 만큼 잔뜩 토해내는 서류 뭉치다. 귀족들은 거기서 건질만한 건더기가 있을지를 곧 뒤질 모습이다.

이제 이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얼빠진 먹보 왕과 왕이 무슨 짓을 해도 떠받드는 귀족, 돈을 바구니째 바치는 관리와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비겁자들. 서민들은 왜 이따위 족속을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루이 필리프 1세, 1841, 캔버스에 유채, 283x182cm, 프랑스 역사 박물관

그런데,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원래 이런 내용이었는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도미에는 소설의 세계관을 빌려왔을 뿐이었다. 이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혐오스러운 왕? 실은, 그 시대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 1세를 빗댄 것이었다.기괴한 귀족과 관리? 그에게 달라붙은 아첨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그림을 받아 본 대중은 통쾌해했다. 하지만 왕과 그 아래 유력자들은 모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경관이 마지못해 나선 이유였다.

‘국왕 모욕죄’, 감옥으로…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부인, 1866
국왕을 모욕하고
정부에 대한 증오를 선동한 죄.
도미에는 결국 법정에 섰다.

6개월 징역형과 500프랑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때가 1832년 2월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그나마 집행유예를 받은 건 다행이었으나… 도미에는 그러고도 정부 비판조의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같은 해 8월, 이번에는 아예 집에서 체포당해 잡혀가고 만다. 도미에는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6개월을 복역해야 했다. 그곳은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옥방이었다. 그는 죄수복을 입은 채 편지를 썼다. 내용은 또 심상치 않았다. “나는 정부를 괴롭히기 위해 여기서도 그림을 잔뜩 그리고 있소.” 아, 비범해도 이렇게 비범할 수 있는지.

그 시대 가장 위험한 화가
빅터 라이네, 오노레 도미에의 사진, 1850년경
도미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를 타고난 인물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 《인간극》을 쓴 소설가.
짐작할 수 있듯, 도미에는 그 시절 가장 위험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

빗대자면 도미에는 안경을 쓴 사냥개 같은 예술가였다. 샘솟는 야성이 있고, 그 야성을 포장할 수 있는 지적 감각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도미에는 동시대에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는지를 정확히 ‘물어뜯을’ 수 있었다. 이를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고발할 수 있었다.

당장의 <가르강튀아>가 대표적인 예였다. 도미에가 가르강튀아로 빗댄 루이 필리프 1세. 그는 원래 ‘시민왕’을 자처한 자였다. 복고 왕정을 무너뜨린 7월 혁명 직후 올라선 인물이었던 만큼, 실제로 시민의 기대 또한 컸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은 있었다. 하지만, 이 사내 또한 사회 개혁 앞에서는 끝내 우유부단했다. 혁명 이후에도 의기양양한 건 가진 자와 있는 자들이었다. 변화를 바란 시민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왕이란 사람은 가만히 권리나 누리고 있고, 귀족과 관리라는 작자들은 왕을 구슬리며 잇속이나 챙기는 것으로 보였을 터였다.

오노레 도미에, 언론의 자유(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1834

하지만 ①누가 앞장서 지적할 수 있는가.

②그런 결기가 있다고 한들, 어떻게 해야 ‘뼈아프게’ 비판할 수 있는가.

도미에가 다 할 수 있었다. 왕의 얼굴부터 과일 배 모양(프랑스어로 ‘Poire’는 ‘잘 속는’,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등의 뜻도 갖고 있다)에 빗대는 것. 현 상황을 풍자하기에 딱 맞는 문학을 끌어오고, 글을 모르는 이조차 한 컷에 알아볼 수 있도록 쉽게 구성하는 일. 이는 분명 재능의 영역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일부·화면 가장 오른쪽에 문제의 추기경을 모델로 뒀다고 알려진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가 있다.)

도미에의 행보는 발자크의 말처럼 과거 르네상스 시절 미켈란젤로를 떠올리게 했다. 그 또한 ‘전쟁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못마땅해 외설적 표현으로 읽히는 손짓을 그렸다는 설이 있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추기경은 아예 신화 속 지옥 수문장인 미누스로 박아버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도미에는 발자크의 표현 그대로 미켈란젤로의 피, 즉 신랄함의 계보를 이어받은 셈이었다.

일터에서 본 모순
오노레 도미에, 세 명의 변호사, 1843~1848, 캔버스에 유채, 41x33cm, 필립스 컬렉션. 그림 속 변호사들은 고개를 꺾을 줄 모른다.
오노레 도미에, 변호인, 1862~1865. 그런 변호인조차도 울먹이게 하는, 더 높이 있는 그 존재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생한 도미에는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컸다.

아버지는 유리공이었다. 종종 시를 짓고 희곡도 썼다. 감수성은 있었으나 탁월함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며 파리로 왔지만, 그의 문장은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다.

도미에는 열두 살 무렵부터 일을 했다. 서점 점원, 법원 심부름꾼 등 여러 현장에서 몸을 굴렸다. 도미에는 서점을 드나드는 예술가 무리와 어울렸다. 법원에서 잡무를 할 때는 귀족과 서민 사이 개운치 못한 장면도 여럿 봤다. 도미에는 그사이 책을 쌓아두며 읽고, 루브르 박물관을 산책하듯 오가며 예술품도 감상했다. 피는 속일 수 없었을까. 그의 마음에도 예술적 열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격동의 시대 속 격동의 손 끝
오노레 도미에, 소녀, 1830, 종이에 분필 등, 알베르티나

도미에는 신고전주의풍 화가 알렉상드르 르누아르에게 그림 기초를 배웠다.

그런 뒤 미술학교 아카데미 쉬스(Acad mie Suisse)에서 실력을 다듬었다. 도미에의 관심 분야는 석판화였다. 이는 석회석 재질의 평평한 판 표면에 그림(도안)을 그린 후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물과 기름의 반발력(反撥力)을 활용한 인쇄 기법이었다. 값싸고 빠르게 그림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도미에가 그런 석판화로 뽑아내려고 한 건? 익살과 풍자의 그림이었다. 이를 택한 건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도미에는 그때부터도 풍자에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나이 대비 풍부한 사회 경험과 독서량에서 나오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그 방식은 당장 돈이 될 수 있었다. 때마침 이런 유형의 그림이 파리에서 유행했다. 여러 신문과 잡지가 더 기발한 석판화를 찾기에 바빴다.

오노레 도미에, 문학 토론, 1864

도미에는 1829년, 당시 파리의 대표적 풍자 주간지였다고 볼 수 있는 『라 실루에트』에 그림을 실었다.

자신 또한 서민 출신이라 애환을 더 외면할 수 없었을까. 노동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게 있기에 더더욱 공감할 수 있었을까. 도미에는 이때부터 권력 비판조의 작품을 신랄하게 내놓기 시작했다.

시절도 하 수상했다. 혁명과 쿠데타의 공기는 귀족과 시민 간 긴장감을 키웠다. 산업혁명의 바람이 거세지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간격도 벌어졌다. 보불 전쟁, 7월 혁명, 그리고 곧 이어질 2월 혁명과 ‘민족의 봄’(1848년 혁명)….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이 격동은, 딸려오는 미래 또한 흔들어놓을 게 분명해보였다. 도미에는 계속해 손을 놀렸다. 처음에는 돈을 벌 목적도 컸지만, 언젠가부터는 사명감도 덩치를 키웠다. 『라 카리카튀르』, 『라 트리뷴』, 그리고 『르 샤르바리』…. 도미에는 정부 비판 성향의 매체에 ‘매운맛 그림’을 거듭 건넸다. 이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감옥으로 보낸 <가르강튀아>였다. 그렇다면, 그가 징역 6개월을 마친 후 내놓은“정부를 괴롭히는” 그림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가장 날카로운, 가장 경제적인
오노레 도미에, 트랑스노냉 거리(1834년 4월 15일), 1834, 석판화, 34.2x51.4c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한 사내가 목이 꺾인 채 누워있다.

그는 숨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늘어진 몸, 핏자국 같은 얼룩을 보면 바로 예상할 수 있다. 그의 등 밑에 깔린 아기는 어떤가. 이미 얼굴에 그늘이 깔렸다. 죽었거나, 곧 죽을 게 확실하다. 왼쪽에는 치마를 입은 여인이 쓰러져 있다.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노인의 앙상한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들 또한, 모두 사망했을 것이다. 제목은 <트랑스노냉 거리(1834년 4월 15일)>. 이는 정부가 노동 시위자를 진압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니까, 군의 발길질에 “한 가정이”, “집에서 잠을 자던 중”, “맥없이 학살당한”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엄밀히 보면 이는 상상화였다. 당시 신문 기사를 읽고 빚어낸 창작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처럼 글만 읽고도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기득권의 급소와 비기득권의 눈물샘을 정확히 후벼팔 수 있었다. 이 그림으로 인해 정부는 또 진땀을 흘렸다. 서민의 마음에는 또 불꽃이 차올랐다. 그가 위험한 화가인 이유였다.

오노레 도미에, 과거, 현재, 미래, 1834, 석판화, 19.6x21cm

비슷한 시기에 내놓은 <과거, 현재, 미래> 또한 눈길을 끈 그림이었다.

길쭉한 배 모양의 얼굴. 우리는 이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루이 필리프 1세다. 왕은 세 개의 표정을 갖고 있다. 왼쪽 과거의 얼굴은 푸근하다. 이는 그의 즉위 당시 시민이 바란 모습이었다. 그런데, 가운데에 있는 현재 얼굴은 마냥 험상궂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꾸만 눈을 흘긴다. 꽉 다문 입 또한 고집불통 행보만 부각한다. 그리고 오른쪽. 왕의 미래 얼굴이다. 잔뜩 화가 난 채 호통만 치고 있다. 무섭게 느껴지는 한편, 그만큼 한심해보이기도 한다.

어물어물한 왕에 대한 민심 변화를 이처럼 경제적으로 그린 작품이 있을까. 도미에의 이런 그림들은 수없이 찍히고 뿌려졌다. 정부는 권력을 조롱하는 출판물 제작자에게 더 무거운 징역형을 내리기로 했다. 관련 출판업자 또한 더 높은 벌금에 처하게끔 법을 손보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야말로, 도미에도 야성을 꺾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를 부드럽게 만든 존재
오노레 도미에, 삼등칸 열차, 1862, 캔버스에 유채, 67x93cm, 캐나다 국립 미술관

그럴 리 없었다.

도미에는 그물망을 피해갔다. 어떻게? 그는 차츰 기득권의 부정을 꼬집기보다, 비기득권의 애환을 내보이기에 집중했다. 타깃이 바뀌었을 뿐 위선, 불평등, 벌어지는 빈부격차 등 고발하려고 한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도미에의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으라면 많은 이가 <삼등칸 열차>를 말할 것이다. 귀족이 타는 일등칸, 부자가 타는 이등칸,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타야 했던 삼등칸. 가장 좁고, 한없이 퀴퀴했을 이곳은 언뜻 봐도 답답해보인다. 두건을 쓴 노인은 낡은 바구니를 소중히 쥔다. 왼편에선 한 여인이 아기를 끌어안고, 오른편에선 꼬마 아이가 꾸벅 졸고 있다.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있다. 나이도, 행색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확실해보이는 건, 이들 모두 지쳤다는 것. 외출의 설렘, 여행의 낭만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다. 단지 오늘의 일거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터였다.

오노레 도미에, 일등칸 열차, 1864

그가 앞서 <가르강튀아>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권력의 위선을 풍자했다면, <삼등칸 열차>를 통해선 서민의 고된 일상을 예리하게 표현했다. 이 또한 민중의 가슴 속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때로는 눈물 한 방울이 힘찬 열 마디 구호만큼 강한 법이니까.

오노레 도미에, 세탁부, 1863년경, 패널에 유채, 48.8x33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도미에에게는 애초 억강부약(抑強扶弱·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움)의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선 <세탁부>와 같은 그림을 결코 그릴 수 없었을 터였다. 빨랫감을 든 여인이 강둑 돌계단을 오른다. 억센 팔과 어두운 복장에서 삶의 힘겨움이 보인다. 뒤로는 센강이 흐른다. 삭막한 건물은 넘어설 수 없는 담벼락인 양 높고 빽빽하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은 당차다. 척척 뻗는 걸음걸이도 씩씩하다. 당장 우리의 삶은 서글프지만,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는 한 미래는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들의 화가 아닌 ‘모두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 공화국, 1848, 캔버스에 유채, 73x60cm, 오르세 미술관

도미에는 평소 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에 2~3개, 많게는 8개 이상의 의뢰를 소화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평생 석판화와 목판화 5000여점, 회화 300여점에 드로잉과 수채화도 800여점을 남길 수 있었다. 느긋하게 살고 싶었다고 한들, 어수선한 세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돈을 굴리는 능력만은 확실히 부족했던 모양이다. 도미에는 그렇게 일을 하고도 많은 순간 빚에 허덕였다. 급할 때는 집안 살림살이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1860년, 그는 쉰두 살을 맞은 그해에 잡지 『르 샤르바리』에서 해고당했는데(대중의 인기가 시들해졌다는 게 이유였다), 그때부터는 더더욱 재정난에 시달렸다. 피로가 쌓인 탓일까. 도미에의 건강은 이쯤부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이었다. 시력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고 있었다. 결국 1877년쯤부터는 앞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세상은 급변했다. 정치 주체를 ‘인민’으로 둔 파리코뮌(Commune of Paris)이 들어섰다가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또 2만여명이 숨지고, 이보다도 많은 4만여명이 법정에 끌려 나왔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민중은 또 한 번 도미에의 날카로운 고발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더는 속 시원히 서민의 애환을 풀어줄 수 없었다. 야성도 밀려오는 노화와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노레 도미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1868년경, 캔버스에 유채, 51x32cm, 노이에 피나코테크

도미에는 생의 말년에 닿고서야 신랄한 예술성을 재차 인정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도미에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2차례나 거절했다. 이는 아래로 향한다는 신념에 따른 행보였다고 한다. 그래도 가까운 화가 카미유 코로에게 집을 선물로 얻고, 나쁘지 않은 액수의 연금도 받으며 아예 없이 살지는 않았다. 1878년에는 첫 개인전을 열고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호평도 받았다. 그리고, 도미에는 그다음 해인 1879년에 조용히 생을 마쳤다. 죽은 곳은 파리 교외의 화실이었다. 향년 일흔한 살 나이였다.

도미에는 그들의 화가가 아닌 모두의 화가로 살았다. 위험한 예술가였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했던 예술가였다. 어느덧 도미에라는 이름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소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보라.
여기 한 명의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미술가,
최고의 시민이었던 도미에가 잠들어 있다.
헌정된 그의 비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도미에의 사망 소식이 도시 전역으로 퍼진 날.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건 소수의 그들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었다.
참고 자료

Honore Daumier, Reuter, Astrid, Hirmer Verlag GmbH

Honoré Daumier, Laughton, Bruce, Yale University Press

Art Against Censorship, Erin Duncan-O‘Neill, Manchester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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