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빈의 명산] 해발 4130m에서 배운 책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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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영상을 하나 봤고, 한 달 뒤 나는 히말라야에 서 있었다.
영상 속에는 평소 운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또래 여성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울며 오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힘든 발걸음을 하나하나 떼고 있을 때쯤, 눈보라 속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휴일에 일하게 되더라도 늘 한 번쯤 더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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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영상을 하나 봤고, 한 달 뒤 나는 히말라야에 서 있었다. 영상 속에는 평소 운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또래 여성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울며 오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힘에 부쳐 주저앉아 울고, 고산병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보다도 그 뒤로 펼쳐진 풍경이 더 또렷이 남았다. 등산이 취미인 나라면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 가볍게 생각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해발 4130m다. 오르는 데 나흘, 내려오는 데 이틀이 걸린다. 실제로 걸어보니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온몸이 근육통으로 아팠다. 그럼에도 히말라야의 풍경은 그런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눈으로 덮인 산자락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몇 차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길 위에서는 동물들도 자연스럽게 풍경의 일부가 됐다. 머리 위로는 독수리가 선회했고, 절벽 위에는 산양이 서 있었다. 길을 점령한 원숭이 떼와도 마주쳤다. 이곳이 히말라야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장면들이었다. 이 길에는 가이드와 포터(짐꾼)가 붙는다. 가이드는 산사태를 비롯해 길 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변수를 맡는다. 포터는 최대 15㎏까지 짐을 들어준다. 나는 단벌신사를 각오하고 8㎏ 정도를 준비했다. 그 덕분에 포터 입장에서는 비교적 수월한 손님이었을 것이다. 베이스캠프에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급변했다. 맑던 하늘이 눈보라로 바뀌었고, 시야는 급격히 좁아졌다. 공기가 옅어지면서 걸음은 느려졌다. 아주 천천히 움직였지만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입술과 손톱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힘든 발걸음을 하나하나 떼고 있을 때쯤, 눈보라 속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쉬고 있던 포터였다. 날씨가 나빠 걱정이 됐다며, 내가 메고 있던 짐까지 들어주러 다시 내려온 것이다. 그는 환한 미소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 가득한 주름은 미소가 깊이 새겨진 흔적이었다.
그의 일은 아니었다. 포터의 역할은 로지(산장)에서 로지로 짐을 옮기는 것이다. 내가 직접 들겠다고 정한 짐은 내가 책임지는 게 원칙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왔다. 망설였지만, 다시 내려온 선택을 가볍게 만들고 싶지 않아 짐을 건넸다. 3㎏ 남짓한 무게가 사라지자 숨이 조금 편해졌고, 가벼운 걸음이 이어졌다.
얼마 뒤 환호성이 들렸다. 눈보라를 헤치고 다가가자 베이스캠프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눈물이 나진 않았다. 몸이 가벼웠기 때문일까. 그날 이후 휴일에 걸려온 전화를 앞에 두고 짜증이 치밀 때면 히말라야에서 만난 포터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다시 내려오면서 짓던 미소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다. 휴일에 울리는 전화가 반갑지 않고, 가능하다면 모른 척하고 싶을 때도 있다. 다만 어떤 일은 근무시간표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말 한 줄, 기사 한 꼭지가 생각보다 멀리 가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 무게를 알고 나면, 내가 쉬는 날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을 밀어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휴일에 일하게 되더라도 늘 한 번쯤 더 생각하게 된다. 눈보라 속에서 이미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오던 한 사람의 모습이, 그 짜증을 가라앉혀 주고 책임감을 일깨워준다.
[최예빈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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