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석의 슬기로운 AI생활] AI가 썼구나 … 인간미 사라지는 이메일

2026. 1. 23. 17:1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이고 매끄러운 문장
진솔하고 서툰 사람냄새 실종
진심 담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만나 나누는 대화뿐
김의석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어느 학기부터인가, 연구실 이메일함의 풍경이 낯설게 변했다. 교수라는 직업 덕분에 매일 수십 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예전에는 모니터 너머의 글자들만 보고도 학생 얼굴이 그려지곤 했다.

문장 곳곳에 수줍음이 배어 있어 '아, 이 친구는 질문 하나 하기도 참 어려워했겠구나' 싶은 학생, 말주변은 없어도 투박한 단어들 사이로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솔직한 학생, 너무 겸손해서 송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거듭하는 학생, 혹은 '저는 그냥 학점만 따면 됩니다'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쿨한 학생까지. 오타가 섞이고 줄바꿈이 어색해도, 그 서툰 흔적들은 학생 각자가 가진 고유한 '사람 냄새'를 전달하는 일종의 지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도착하는 메일들은 하나같이 매끄럽다. 문법은 완벽하고, 구성은 논리적이며, 예의는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고 나면 머릿속에 학생의 이미지가 남지 않는다. 마치 인공지능(AI)이라는 훌륭한 비서를 거쳐 나온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AI를 기반으로 혁신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이 매끈한 문장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금세 눈치채고 만다.

우리가 AI를 통해 글을 쓸 때, 그 이면에는 세 가지 핵심 원리가 작동한다. 수많은 언어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내가 입력한 '문맥을 이해'한 뒤, 그다음 단어로 무엇이 가장 적절할지를 '확률적으로 예측(Next Token Prediction)'한다. 말하자면 AI는 사용자의 요청을 분석해 그에 맞는 '말투의 지도'를 쫙 펼쳐놓고, 그 안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안전한 단어들을 골라 하나씩 연결해 나가는 셈이다. 결과물은 완벽하다. 비문도 없고 논리도 정연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서툶'은 거세된다. 고민 끝에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 흔적, 감정이 북받쳐 뜬금없이 생긴 빈칸, 그리고 그 사람만의 독특한 언어 습관 같은 것들 말이다. AI가 그려낸 완벽한 말투의 지도 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는 존재가 서 있을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심을 전하며 살아가게 될까? 궁금한 마음에 수업이 끝나고 몇몇 학생들에게 물었다. "모든 소통이 AI로 정형화되면, 너희는 상대의 진심을 어떻게 알아채니?"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교수님, 이제 이메일이나 SNS 메시지는 그냥 '정보 전달용'일 뿐이에요. 정말 진심을 전해야 할 땐 결국 직접 가서 말로 해야 할 것 같아요."

기술이 극도로 발달할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원초적인 소통 방식으로 회귀하게 된다. 모든 메시지가 AI라는 필터를 거쳐 매끄럽게 가공되는 세상에서,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와 '눈빛'이 유일한 진심의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나의 말투와 성격, 지식까지 학습한 'AI 페르소나'가 나를 대신해 소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페르소나라도 우리가 마주 앉아 나누는 침묵의 공기, 말문이 막혔을 때의 그 떨림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글을 더 잘 쓸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기계적인 완벽함 속에 나의 진심을 한 방울 섞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조금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직접 고심해 고른 단어 하나와 정성이 담긴 줄바꿈이 AI가 만든 천 줄의 명문장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나 역시 모든 소통에서 AI를 걷어내기는 어렵겠지만, 학생들에게 답장을 보낼 때만큼은 AI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해 보려 한다.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모니터 너머의 학생이 '아, 우리 교수님은 이런 말투로 말씀하시지'라며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글을 써 내려가고 싶다. 디지털의 바다에서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우리의 인간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김의석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