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는 상실, 되살리는 무대[이주영의 연뮤덕질기](65)

고통스러운 기억을 없앨 수만 있다면 삶이 나아질까?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의식의 전이 등 심리치료 시스템이 전면에 등장하는 고통 완화 작품이 다양하다. 근미래 과학기술이 병풍처럼 펼쳐지면서 감정의 근원인 ‘상실’을 파헤치는 방식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설명할 수 없는 죽음’과 ‘충분히 애도하지 않은 이별’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왔다. 국가는 사건을 종결했지만, 감정은 해결되지 않은 채 사회의 무의식 속에 퇴적됐다. 유가족과 관계자들에게, 사회 전반의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증식하는 상실의 고통은 어디로 향하는가. 고통의 더께를 인식하고 직시하는 연극 <튜링머신>·<풀>(POOL)·<시뮬라시옹>, 뮤지컬 <캐빈> 등은 상실의 본질을 해체한다. 우리가 상실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놓쳐왔는지를 되짚는다.
AI의 근간이 된 상실
연극 <튜링머신>(브누아 솔레스 작, 박다솔 번역, 신유청 연출, 김진숙 윤색·조연출, 최영은 무대·소품, 강지혜 조명, 지미 세르 음악·음향, 이소영 움직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작)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의 ‘거대한 상실’에 주목한다. 그의 삶을 관통한 질문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에서 출발한 ‘튜링머신’은 상실의 결정체다. 청소년기 앨런에게 지와 사랑의 합체였던 크리스토퍼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후 앨런의 삶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크리스토퍼의 지적 영속성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로 앨런은 AI의 논리적 근간인 튜링머신을 설계하기에 이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해낸 인류사의 수훈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은 고독과 배제의 연속이었다. 무대 위에서 앨런 튜링(이승주·이상윤·이동휘 분)은 끊임없이 전환한다. 화자였다가 당사자가 되고, 주변 인물 로스(이휘종·최정우·문유강 분) 등 여러 얼굴을 빌려 객관화된 심연을 드러낸다. 신유청 연출은 이를 고스란히 관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4면 객석 무대로 구현했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해체된 앨런의 생생한 고뇌는 비선형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이야기가 아닌 감각으로 수용된다. 무대 중앙에 놓인 원형의 ‘튜링머신’과 그의 삶을 대표하는 여러 오브제는 첫사랑이자 지적 동반자였던 크리스토퍼를 보존하려는 사유이자 상실을 무화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시각화다. 그가 애니그마 해독장치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정은 기술이 처음부터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컴퓨터는 냉정한 계산의 산물이 아니라 잃어버린 존재를 붙들기 위한 감정의 정수라는 의미다.
연극 <시뮬라시옹>(최양현 작, 이태린 연출, 송지인 무대, 성미림 조명, 조한 음악, 이진성 움직임, 예술창작공작 콤마앤드 제작)은 상실을 대체하며 살아가는 근미래 일상을 다룬다. 선욱(송철호 분)은 비행기 사고로 잃은 아내 상아(신사랑 분)를 데이터로 되살린다. 상용화된 AI 기억 복원 시스템을 통해서다.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상실을 대체한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AI 아내가 ‘가짜’여서가 아니다. 선욱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점점 기억 속의 아내와 다른 감정과 결여를 드러내기 시작해서다. 상실은 본질적으로 대체될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상실을 포용하는 방법
연극 <풀>(POOL)(이세희 작, 부새롬 연출, 유태희 무대·소품, 김소현 조명, 정병목·장주희 영상, 달나라동백꽃 제작)은 더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상실이 대체될 수 없다면 사회는 이 집단 고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 작품에서 상실은 더 이상 개인의 내밀한 고통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이며, 통제되지 않을 경우 사회 전반을 위협하는 불안정 요소로 재정의된다. 기억 제거술이 보편화한 코마 환자 급증 시대, 치료를 위한 VR 시스템이 정부 지원으로 개발된다. 진두지휘한 교수 ‘나’(김정 분)가 직접 알파테스트에 참여하면서 시스템은 예상 밖 스테이지로 향한다. 청소년 딸을 상실한 기억을 제거하고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던 그의 삶은 시스템 안에서 해체된다. ‘나’의 무의식이 상실의 고통을 다른 방법으로 재현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시스템명 풀(POOL)은 물론이고 시스템 속 NPC(신윤지·정화·신정원 분)는 모두 딸의 생전 삶과 밀접한 존재다. 시스템 밖의 조수들(김별·류원준 분)은 이를 모두 인식한 박사가 스스로 코마에 빠질까 안절부절못하지만, 결론은 예상 밖이다. 스스로 삭제한 기억을 되찾는 순간 ‘나’는 비로소 본질을 찾은 안정된 상태에 이른다.

기술에서 대안을 찾는 작품들과 달리 뮤지컬 <캐빈>(현지은 작·작사, 강소연 작곡·음악, 박한근 연출, 홍유선 안무, 이모셔널씨어터 무대·조명·영상·소품·제작)은 가장 인간적이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대안을 제시한다. 상실을 없애지도, 지우지도, 관리하지도 않은 채 그 감정을 안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항공기 참사에서 아들 캐빈을 잃은 마이클(박호산·하도권·윤석원 분)과 생존자 데이(정동화·유승현·홍성원 분)는 오두막 캐빈에 갇혀 있다. 각자의 죄책감과 마주하는 사이코드라마 속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되는 자리에서 그들은 탈출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 상실을 안은 채 함께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캐빈>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캐빈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남긴 편지와 문장, 여러 흔적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증거가 된다. 중의적인 타이틀 ‘캐빈’은 상실의 고통에 침잠한 자아이자 상실과의 동행을 선택한 자아이기도 하다.
상실의 더께는 애초에 긁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튜링머신>은 상실이 사유의 출발점이었음을 증명하고, <시뮬라시옹>은 상실을 대체하려는 욕망의 한계를 드러낸다. <풀>(POOL)은 상실을 관리 대상으로 삼는 사회의 위험을 경고하고, <캐빈>은 끝내 인간에게 질문을 되돌린다. 상실을 제거한 사회는 과연 안전한가? 고통의 기억을 지운 삶이 과연 나다운 삶인가. 튜링머신은 차가운 수학적 설계도로 인식하지만, 그 기저에는 ‘사랑하는 이의 정신을 망각과 죽음으로부터 구출해내 영속성을 가진 무언가에 담아두고 싶다’는 지극히 뜨겁고 인간적인 열망에서 시작됐다. 튜링은 끝내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영국 정부로부터 화학적 거세를 당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다른 작품들은 상연이 끝났으나 조만간 어딘가에서 계속 상연될 것으로 기대된다. <튜링머신>과 <캐빈>은 3월 1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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