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창과 군무 대신 AI···뒤집히고 있는 인도 영화판

인도 영화판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발리우드(Bollywood·봄베이(뭄바이)+할리우드)’로 불리며 미국 할리우드에 맞먹는 영향력을 보여온 인도 영화는 그간 화려한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뮤지컬 형식으로 대표돼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과 결합한 시도가 본격화되며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인도 최초의 완전한 AI 기반 극장용 장편 영화 <치란지비 하누만–더 이터널>의 1차 티저 영상이 지난해 12월 공개됐다. 이 작품은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 가운데 하나이자 신앙과 힘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하누만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대형 프로젝트다. 티저 영상은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하누만을 담아내며, 할리우드 대작을 연상시키는 스케일을 보여준다. ‘인도 내셔널 어워드’ 수상 경력을 지닌 라제시 마푸스카르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스타스튜디오를 비롯한 인도 주요 제작사들이 참여해 올해 전 세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대규모 자본과 인기 감독, 주요 제작사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인도 영화계가 실험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AI 중심 제작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마푸스카르 감독은 힌두스탄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AI를 환영하고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AI가 기존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하며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의 아주 작은 근육 움직임까지도 감독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지만, AI는 창작 과정에서 또 하나의 두뇌처럼 작동하는 협업자에 가깝다”고 밝혔다. 이어 “AI는 상호작용하는 도구로 감독과 나란히 사고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AI 영화 <나이샤>가 쏘아올린 공
지난해 5월 개봉한 비벡 안찰리아 감독의 영화 <나이샤>는 인도 영화계에서 AI 인식 전환의 계기로 꼽힌다. 이 작품은 기획 단계에서 챗GPT를 활용해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시각화 과정에서는 이미지 생성 AI를 통해 전체 분량의 약 95%를 구현했다. 제작비는 기존 발리우드 영화의 약 15%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영화 속 주인공 나이샤는 실존 배우가 아닌 AI로 생성된 캐릭터임에도 실제 주얼리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며 주목을 받았다.

인도 영화계가 이처럼 빠르게 AI를 도입한 배경에는 산업·정책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도 중앙정부와 주정부는 애니메이션, 시각효과(VFX), 게임, 확장현실(XR)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며 AI와 시각효과 인프라에 대한 세제 혜택과 지원을 확대해왔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생산국답게 이미 축적된 시각효과·애니메이션 인력과 기술 역량도 AI 도입에 대한 기술적·문화적 거부감을 낮췄다는 분석이다. 반면 할리우드는 노조 중심으로 배우와 스태프의 일자리, 초상권과 저작권 보호를 둘러싼 저항이 강해 AI 활용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그사이 인도 제작사들은 수백억원에 달하는 고액 스타 출연료 부담을 줄이고,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대규모 비주얼을 구현할 수 있는 대안으로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 상업영화 시장에서 상위급 스타들의 출연료는 한 편당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일부 슈퍼스타들은 영화 한 편당 2000만달러(약 293억원)가 넘는 출연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고액 스타 캐스팅 대신 AI와 시각효과 중심의 ‘저비용·고효율’ 제작 전략이 점차 현실적인 선택지로 떠오르고 있다.
AI 배우의 등장도 이어지고 있다. AI 배우인 나이나 아브타르는 지난해 10월 마이크로 드라마 시리즈 <트루스 앤드 라이즈>로 공식 데뷔했다. AI 인플루언서로 인기를 끌던 그는 드라마 출연과 함께 자신의 SNS를 통해 직접 홍보에 나섰다. 그는 “<트루스 앤드 라이즈>는 단순한 데뷔작이 아니라 AI도 느끼고 연기하며 생각을 자극할 수 있다는 증거”라며 “나는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을 통해 인간을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먼저 온 미래’가 던지는 질문
배우의 과거 모습을 재현하는 ‘디에이징 기술’도 확산하고 있다. 원로 배우 맘무티(74)는 영화 <레카치트람>에서 AI 기술을 통해 30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배우 사티아라지(72)는 BBC 인터뷰에서 “AI가 배우의 수명을 연장하고 액션 주연을 계속 맡을 수 있게 해준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AI 활용이 만능 해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인도에는 AI를 통한 이름·목소리·초상 도용을 명확히 규제하는 법률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고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 등 거장들의 목소리를 AI로 복원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지만, 유족의 동의 여부와 별개로 법적 권리관계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같은 논란은 지난해 여름 에로스 인터내셔널이 2013년 로맨스 영화 <라안자나>의 결말을 AI로 수정해 재개봉하면서 불을 붙였다. 원작에서 남자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 결말을 AI를 통해 살아남는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이에 대해 원작 감독 아난드 L 라이는 “창작자의 의도와 맥락, 작품의 영혼을 AI가 임의로 바꿔놓았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주연 배우 다누시 역시 “이 대체 결말은 영화의 영혼을 제거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이는 영화 스튜디오가 기존 작품의 서사를 AI로 변경해 재개봉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제작사 측은 기술 발전 과정에서 반복돼온 충돌의 연장선이라며 법적·제도적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드위베디 CEO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갈 때마다 반발은 있었다”며 “AI는 새로운 시대의 스토리텔링 도구”라고 주장했다.
리처드 앨런 홍콩시립대 영화·미디어아트학과 교수는 알자지라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AI를 활용한 영화 수정은 앞으로 글로벌 영화 산업에서 점점 보편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제작자가 수익을 낼 수 있다면, AI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인도의 사례는 단순한 기술 보완이 아니라 서사의 핵심을 바꾼 개입이라는 점에서 향후 영화 산업에서 AI 활용의 경계와 기준을 다시 설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인도 영화계에 ‘먼저 온 미래’는 기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이제 영화계 전체에 던지고 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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