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기부인 줄 알았는데... 환경 테러였다니 [지금, 순환경제]

조신주 2026. 1. 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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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헌 옷 수출, 순환 아닌 폐기의 악순환
값싼 중고 의류가 짓누르는 개발도상국 산업
유럽, 의류 폐기물 수출 전면 금지로 방향 선회
한국, 책임 있는 순환 패션 시스템 구축 시급

[지데일리] 패션의 나라가 만든 잔혹한 순환고리일까.

거리의 분리수거함에 무심히 넣은 헌 옷 한 봉지가 지구 반대편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 국내에서 버려지는 의류 중 상당수는 태평양을 건너 동남아의 시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여정의 끝은 새로운 주인을 찾는 ‘순환’이 아니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오르는 ‘소각’의 운명이다. 

 

한국은 세계 4위 헌 옷 수출국으로, 연간 30만 톤의 의류 폐기물을 동남아 등으로 수출하며 환경·산업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순환경제 실현과 자국 내 재활용 강화가 과제로 떠오른다. AI생성

 

 

한국은 이미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헌 옷을 수출하고 있으며, 인구 대비로는 두 번째로 많은 양을 해외로 내보낸다. 연간 30만 톤. 수치로는 들리지 않는 거대한 무게다. 이 막대한 옷더미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패션 과잉’과 ‘순환 착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헌 옷의 종착지, 순환의 착각

국내 헌 옷 수거함에 모이는 의류는 대부분 재활용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섬유의 재활용률은 20%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머지는 해외로 수출된다. 수출이라지만 사실상 ‘폐기물 이전’에 가깝다.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케냐, 가나 등은 선진국의 헌 옷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나라들이다. 겉보기엔 현지 시장에서 저렴한 중고 의류로 재판매되어 새 생명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중 70~80%는 팔리지 못한 채 산처럼 쌓인다. 결국 남은 옷들은 소각되거나 매립되며, 그 과정에서 유독성 물질이 나오고,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킨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현지 주민들의 몫이다. 버려진 옷더미 사이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오염된 토양은 농작물에 영향을 미친다. 한때 재활용이라 믿었던 행동이 타국에 환경적 부담을 전가하는 ‘윤리적 딜레마’로 변하는 순간이다.

현지 산업을 짓누르는 ‘저가 중고 의류’의 그늘

선진국에서 흘러들어온 헌 옷은 현지의 섬유 산업을 위축시키고 있다. 가나, 케냐 등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고급 폐기물(high-quality waste)”이라는 표현으로 서구의 헌 옷 수입을 비판해왔다. 값싼 중고 의류가 시장을 잠식하면서, 현지 생산업체들은 경쟁력을 잃고 문을 닫았다. 신제품을 생산하는 산업 기반 자체가 흔들리자, 지역 경제의 자립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결국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소비문화가 타국의 산업 발전을 막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현지에서는 헌 옷 수입 규제를 강화하거나, 전면 금지를 추진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루완다와 케냐, 우간다 등은 이를 ‘경제 독립 행위’로 간주하며 단계적 금수 조치를 진행했다.

유럽이 먼저 깨달은 ‘수출 금지’의 당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유럽은 이미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은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의류 폐기물 수출 전면 금지’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차원을 넘어, 순환경제의 실현이라는 산업 구조 전환의 신호탄이다. 2025년부터 시행되는 EU의 ‘섬유 대책(Textex Strategy)’은 모든 회원국에 의류 분리수거 의무화를 요구하며, 재활용을 국내에서 자체 처리하도록 촉구한다.

이 변화는 ‘폐기물의 세계화’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선언이다. 즉, 선진국의 소비가 제3세계의 환경 피해로 귀결되는 구조를 끊고, 자국 내에서 쓰레기를 책임지는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 멈춰서지 못했다

문제는 우리다. 한국은 여전히 ‘헌 옷 수출 강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패스트패션의 범람, 계절마다 바뀌는 SNS 중심의 소비 트렌드, 저가 브랜드의 무한 생산이 맞물리며, 의류 폐기물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 결과, 국내의 순환 시스템은 넘쳐나고, 해외로의 ‘수출’이라는 형태로 쓰레기가 떠밀린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여전히 ‘헌 옷이 재활용된다’는 낡은 인식에 묶여 있다. 실제로 많은 지방자치단체의 수거함 운영은 민간 위탁 형태로, 옷의 행방 관리나 품질 검증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쓰레기 수출의 사슬’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 '패션의 양심'을 묻는다

해법은 ‘의류 순환의 본질’을 다시 정의하는 데 있다. 헌 옷을 무조건 버리고, 다시 누군가에게 팔리기를 기대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순환이란 재사용을 넘어 ‘감축(Reduce)’과 ‘재설계(Redesign)’의 단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즉, 애초에 덜 만들고, 덜 사는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의류 폐기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헌 옷의 이동 경로와 최종 처리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는 추적 시스템을 구축해, 국내에서 수거된 의류가 실제로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데이터로 기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불법적인 폐기나 무분별한 수출을 방지하고, 재활용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동시에 국내 재활용 인프라를 강화해 해외로의 수출이 아닌 국내 순환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생산자책임확대제(EPR)를 강화해 브랜드가 제품의 생산 단계에서부터 폐기물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친환경 소재 개발과 과잉 생산 억제를 유도해야 한다.

 

이와 함께 시민들이 헌 옷 기부나 수출이 곧 선행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소비 자체를 줄이고 오래 입는 문화를 확산할 수 있도록 대중 인식 개선 캠페인이 절실하다.

 

소비자에게도 역할은 있다. 단 한 벌의 옷을 더 오래 입는 행동은, 바다 너머에서 쌓여가는 쓰레기산을 줄이는 직접적인 힘이 된다. 브랜드에는 디자인 단계부터 재활용 가능한 소재 사용과 생산량 조절이 요구된다.

변화의 시작은 ‘책임의 주체’에서

한국은 이제 의류 폐기물 문제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더 이상 “헌 옷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뒤에 숨을 수 없는 시대다. 착하게 버린 착각에서 벗어나, 진짜 순환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손끝의 선택이 타국의 공기와 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이제는 패션의 책임을 묻고, 그 답을 행동으로 내놓아야 한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이 선진국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이자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