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계승 문법을 거부한 수묵화를 닮은 무협만화[덕후의 서재]

2026. 1. 23.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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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길을 너는 걷지 마라."

전통 무협의 핵심은 계승이다.

노소하에게도 무명이 감내해야 했던 불사의 저주가 닥치지만, 노소하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서라도 마침내 이 업보 계승을 벗어나야 한다.

원한의 무대에서, 무공의 중심지에서, 계승의 질서에서 이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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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후의 서재

“내가 걸어온 길을 너는 걷지 마라.”

전통 무협의 핵심은 계승이다. 무공은 이어지고, 원한은 물려주게 되며, 제자는 스승의 이름으로 검을 든다. 그러나 김성진 작가의 웹툰 ‘앵무살수’는 이 익숙한 구조를 끝까지 따르지 않는다. 네이버웹툰에서 2020년 연재를 시작해 2024년 완결, 평점 9.9 후반대를 기록한 이 작품은 계승을 성취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승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스승이자 아버지였던 이종보는 고려 출신이다. 그는 무에서는 천재적이지만, 중국 화산파에 와서는 텃세에 밀려 주변인이 된다. 결국 장창귀 살수로서 살게 된 그가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 ‘소하’는 작은 강, 싸움 없는 삶을 뜻한다. 구파검법을 물려주면서도 그 삶만은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전통 무협의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적극적으로 강호를 맡기는 것과 달리, 이종보는 강호로부터 떼어놓으려 한 아버지다.

이 작품의 최후의 적은 불사인 ‘무명’이다.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계승이 끝없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진시황의 영생을 위한 고문과도 같은 실험 속에서, 황제가 그렇게 원하던 영생을 얻었지만 이름도 삶도 허무도 끝낼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끝나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의미는 퇴색되고, 모든 것은 무화된다. 무명은 그게 무엇이든 무한히 계승하면, 그 종착지는 ‘무’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허무’ 자체다. 노소하에게도 무명이 감내해야 했던 불사의 저주가 닥치지만, 노소하는 아버지를 뛰어넘어서라도 마침내 이 업보 계승을 벗어나야 한다.

여정이 끝난 후, 노소하와 장미려는 중원을 떠나 고려로 향한다. 무협의 결말은 보통 강호의 패자가 되거나 질서를 이어받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 번째를 택한다. 강호를 떠난다. 원한의 무대에서, 무공의 중심지에서, 계승의 질서에서 이탈한다. 노소하는 더 이상 이종보의 아들로, 이방인으로, 구파검법의 계승자로, 그리고 살수로 살 필요가 없다. 이름대로 작은 강 곁이면 된다. 이는 승리도 패배도 아닌, 무한한 해방이다.

압도적인 필력의 흑백 그림체도 인상적이다. 세련되고 재기 넘치며, 화려한 컬러를 자랑하는 소위 현대적 무협만화들 사이에서 무도와 협의, 삶의 의미를 묵묵히 검은 흑과 백으로만 그려냈다. 여백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 동아시아의 수묵화 같은 이런 무협만화를 우리는 계속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전혜정 청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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