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날벼락…속도 내는 태국 ‘랜드 브리지’ [이규화의 지리각각]

이규화 2026. 1. 23.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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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태국 총선 앞두고 아누틴 총리, 건설 공약
말레이반도 중간, 西 안다만해―東 타이만 연결
말라카해협 통과보다 4일·비용 15% 단축 효과
물류 허브로 부 쌓아온 싱가포르, 패싱당할 위기
지리적 이점도 항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례


말레이반도 랜드 브리지 건설 계획을 소개한 태국 교통부 자료. 방콕 포스트

태국 방콕포스트는 최근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가 타이만과 안다만해를 연결하는 육상연결운송로(랜드 브리지) 사업을 반드시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고 보도했다. 다음 달 8일 총선을 앞두고 태국 각 정당들은 말레이반도 ‘랜드 브리지’에 대한 입장을 내고 있다. 필요성은 인정하나 미묘한 시각 차를 보인다.

아누틴 총리가 이끄는 폼자이타이당은 태국을 글로벌 물류 허브로 만드는 ‘게임 체인저’라며 강력 추진 입장이다. 탁신 가문 중심의 프아타이당은 원칙적으로 찬성하나 막대한 예산 소요로 인해 신중론을 펴고 있다. 진보 계열의 국민의당은 비판적 검토와 환경 파괴 문제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들 주요 3당 입장의 저류에는 공통적으로 ‘막대한 자금 문제만 해소된다면야’ 라는 심리가 존재한다. 그만큼 태국인들에게 말레이반도 허리춤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랜드 브리지는 국운을 바꿀 프로젝트로 인식되고 있다.

이 사업은 동남아시아를 넘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해상운송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거대 프로젝트다. 한국과 일본 대만이 산업화로 본격 진입한 이래 70년간 대유럽 해상 무역로는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의 좁은 말라카해협을 지났다. 그 길목을 지키고 있는 싱가포르에는 번영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태국이 새로운 말레이반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운송로를 만들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국제 해상 물류의 심장부 역할을 해온 싱가포르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말라카해협을 우회해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새로운 물류 축이 생길 경우, 물류 허브 싱가포르의 최대 강점이 구조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태국 정부가 추진 중인 랜드 브리지 프로젝트는 말레이반도 허리쯤의 동쪽해안 타이만 춤폰에서 서쪽해안 안다만해 라농까지 약 90㎞ 구간을 고속도로와 철도로 연결하는 복합 운송 인프라 구축 사업이다. 운하 건설 대신 육상 연결 방식을 택해 환경·안보 논란을 피해가면서도, 선박이 말라카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화물을 하역·환적해 반대편 바다로 이동시키는 구조다. 총 사업비는 1조~1조4000억바트(약 47조~66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태국 정부는 2030년까지 1단계 항만과 핵심 인프라 완공을 목표로 내걸고 글로벌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태국이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동아시아와 인도양을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해상 운송로를 단축함으로써 막대한 물류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다. 태국은 육상 연결로를 통해 항로를 단축하면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의 운송 시간이 약 4일 줄고, 비용도 15% 절감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다만 이 수치는 공식 조사와 분석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실제 절감 효과는 교통량, 운영 효율, 환적 비용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말라카해협이 지닌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말라카해협은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약 25%가 통과하는 초 혼잡 구간으로, 병목 현상과 해적 위험,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존한다.

태국 랜드 브리지 계획을 지켜보며 싱가포르는 초지한 심정이다.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섬나라로서 면적이 서울보다 조금 크고 인구도 600만명에 지나지 않는 도시국가다. 자체 시장이나 산업이 크지 않음에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국제 해운의 결절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환적항 중 하나로 발전했다.

여기에 항만 물류를 기반으로 금융, 보험, 선박 중개, 해운 법률, 석유 및 원자재 트레이딩까지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이 촘촘히 얽혀 국가 경쟁력을 키워왔다. 2025년 기준 1인당 명목 GDP가 9만달러 넘는 부를 누리고 있다. 최근 들어 IT산업 촉진으로 산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지만, 싱가포르 부의 팔 할이 지리적 이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위치가 낳은 천부적 혜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태국 랜드 브리지가 말라카해협의 ‘필수 통과성’을 약화시킬 경우, 이 생태계 전체가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환적 물량 감소는 항만 수익 감소로 직결되고, 이는 해운·물류 금융과 보험, 해상 중개 산업의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선사와 트레이더들이 싱가포르를 거치지 않고도 아시아–유럽 노선을 운용할 수 있다면, 싱가포르에 집적된 해운 관련 비즈니스와 자금 흐름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싱가포르의 전략적 가치 하락은 안보·외교적 영향으로도 번질 수 있다. 지금까지 싱가포르는 해상 교통의 핵심 요충지라는 점을 이용해 미·중을 비롯한 주요 강대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협상의 장(venue of negotiation)이 되어왔다. 그러나 말레이반도 중간에 새로운 육상·해상 복합 물류축이 들어설 경우,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약화될 것이다. 이는 싱가포르가 누려온 외교적 중재자 역할까지 위축시키는 요인이 된다.

물론 태국 랜드 브리지 사업이 순항할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막대한 재원 조달, 물류 효율성 검증, 항만·철도 운영의 경제성 확보라는 난제가 남아 있고, 기존 해운 네트워크를 완전히 대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태국의 만성적 정국 불안으로 인해 사업 지속성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최근 불거진 캄보디아와의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비용과 리스크 분산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글로벌 공급망의 속성상 ‘대안 루트’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판을 흔드는 변수다.

동남아 물류 지형의 변화는 단지 교통 인프라 경쟁을 넘어, 금융과 산업, 외교 지형까지 재편할 잠재력을 갖는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태국의 랜드 브리지 프로젝트가 싱가포르에는 ‘재앙’이 될지, 아니면 경쟁을 촉진하는 ‘경고음’에 그칠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라카해협이라는 지리적 특혜에 기반한 싱가포르의 시대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규화 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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