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라는 ‘국민’ 배우의 죽음이 남긴 질문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국민 배우’ 안성기씨가 영면에 들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나도 그렇다. 그는 훌륭한 배우였고, 참으로 드문 인성과 품격을 지닌 아름다운 인물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그 대상에게 우리가 부여했던 가치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다. 배우 안성기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이 크고 폭넓은 상실감은 그가 우리와 맺었던 관계의 폭이 그만큼 넓었고 또 깊었다는 뜻이다.

안성기라는 인물이 그간 우리와 맺었던 관계 양상은 ‘국민 배우’라는 호칭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그를 알고 그에게 호감을 품는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알고 좋아한다. 그가 더 많은 영화에 나와서 더 좋은 연기를 우리에게 선보여주기를 기대했다. 단순히 유명한 인물이라면 배우 안성기를 넘어서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비교적 안정된 공동체의 구성원 거의 전부가 누군가를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대표할 수 있다고, 그들 구성원 거의 전부가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하늘에 어떤 별이 떠 있어서 그걸 바라보는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 안에 있던 누군가가 스르르 하늘에 떠올라 모두를 대표하는 별이 되는 일이다. 전자는 별이 정체성이고 그걸 공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것이라면, 후자는 공동체가 정체성이고 그걸 대표할 수 있게 된 누군가가 별이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별도 있고 공동체도 있다. 과거의 국가 혹은 모종의 정치공동체는 ‘왕’이라는 자격을 선포한 주권자가 별이 되었고 그 아래에 사람이 모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권자(sovereign: 말 그대로 위에서 다스리는 자)와 신민(subject: 말 그대로 허리를 굽힌 자)은 주종관계와 인과적 선후관계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하지만 근대사회가 창설된 이후로,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인민이 스스로 주권자가 되었다. 종복이 주체(subject)가 되는 엄청난 의미 변동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대리자를 자신들 가운데에서 뽑아 (지위가 높다기보다는 널리 살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높은 자리에 올리거나, 자신들의 정서를 담아줄 수 있을 만큼 예쁜 풍선을 골라 하늘에 띄웠다. 이들 두 존재 모두 언필칭 ‘국민’으로서 우리의 삶을 포괄했지만, 그 구체적 양상은 달랐다. 전자는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분할에 토대를 두어 있었기에 ‘공권력’의 힘으로 우리를 통합했다. 반면에 후자는 우리의 마음이 ‘부력’으로서 유지되는 한 우리 모두가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우리를 통합해주는 스타가 됐다.
안성기라는 ‘국민’ 배우의 영면이 안타까운 이유를 적어도 내 안에서 하나 더 찾자면 그가 그런 시대의 얼마 남지 않은 별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는 국민 배우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 얼마 없다. 그와 유사한 배경에서 만들어진 국민 가수나 국민 개그맨 같은 호칭이 적격인 이들을 꼽아보면 손가락을 몇 개 쓰지 않아도 될 정도다. 물론 다수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아이돌이 있고, 새로 부상하는 세칭 인플루언서도 있다. 개중에는 국민 범위를 훌쩍 넘어설 정도의 포괄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 훌륭한 존재도 많다. 하지만 아이돌은 제아무리 개별 인물의 재능과 자질이 훌륭하고 열화 같은 사랑을 받는다 해도 애초부터 잠시간의 애드벌룬(말 그대로 광고판) 같은 용도로 띄워진 거라서, 고 안성기 배우처럼 60년 이상을 지속하는 풍선이 되기는 어렵다. 설혹 오래 지속되는 스타가 나올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대표하는 공동체성이라는 게 무엇일지,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짐작하기 어렵다. 공동체가 선행하고 스타가 후행된 형태라기보다는, 마치 중세적 공동체가 그러했듯 스타 아래에서 스타가 담지하는 어떤 가치와 특성을 좇아 모인 공동체라서 그렇다. BTS의 팬클럽 아미와 같은 사례처럼 아미의 가치가 BTS에 역투입되는 상호작용적 공동체가 있어서 흥미롭지만, 그 아미가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BTS가 아닌 다른 풍선을 띄워 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개인적 생각을 굳이 글로 펼치는 까닭은, 나이 들어가는 세대가 종종 자신의 과거 경험을 과잉 일반화하고 그것에 노스탤지어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저 대책 없이 혀나 끌끌 차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잘해서 또 다른 국민 배우·가수·개그맨이 되라고 다그치려는 것도 아니며, 팬들이 노력해서 새로운 국민 배우·가수·개그맨의 후속 세대를 만들어달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굳이 ‘문제’로 정의할 결정적 이유도 현재로서는 없으며, 따라서 문제해결을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동인도 그리 크지 않다. 다만 우리의 삶에 여전히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대규모 정치 공동체는 존속될 것이며, 가능한 한 오래 존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모종의 선행 판단을 전제로 삼을 뿐이다. 그런 존속을 위해선 정당한 공권력에 기초를 둔 통합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의 인지적이고 정서적인 통합, 즉 문화적 통합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통합이라는 말 속에 강제와 균질화라는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가 녹아들어가 있어서 좀 꺼려질 순 있어도, 통합 자체는 부정될 수 없는 가치다. 좀 더 중층적이고, 다채롭고, 느슨하지만 힘을 가진 통합 말이다.
별을 띄우는 마음과 문화적 통합
윤석열의 내란으로 우리 정치 공동체의 ‘공권력’이 정당한 통합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 천만다행으로 제도와 절차에 따라 공권력의 정당한 복원을 이룰 수 있었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을지 아니면 우리 안에 내전적 상태와 멘탈리티를 상시화하는 분기점이 되었을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물론 나는 더 단단해질 가능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며, 당연히 그 방향으로 희망을 품는다. 공화적 가치를 우선시하지 않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비율을 차지하며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기도 하지만, 여전히 절대다수는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온 공화제적 삶의 형식을 붕괴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대놓고 공화적 질서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 가장 밑바탕에 반공화적 신념을 깔고 있는 이들의 비율이 절대다수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 비율이 커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데 있다. 자신들의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반공화적 신념을 부추기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에 의한 통합 가능성 외에도 문화에 의한 통합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 가히 ‘국민’ 배우·가수·개그맨이라고 지칭할 만한 누군가가 저 높은 곳에 홀연한 별로 떠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런 누군가를 바라고, 그런 누군가를 띄워 올릴 수 있고, 그런 누군가를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심성’ 그 자체가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역량’이자 ‘의지’라고 생각한다. 즉 그냥 외부의 조건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어지거나 반응하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그런 외부적 조건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지향성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 이상의 국민 배우·가수·개그맨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우리의 마음, 역량, 의지가 그냥 저절로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조율하는 미디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국민’ 배우·가수·개그맨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의지를 촉진했다면, ‘소셜미디어’의 시대는 그것을 허무는 방향으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국민 공동체(nation-state)의 창설이 매스미디어를 낳았고 그 매스미디어가 (다분히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국민(nation)을 강화시켰다. 매스미디어 시대에도 물론 국민을 넘어서는 상상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세계적 슈퍼스타라는 존재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매스미디어 시대까지는 그럭저럭 국민국가가 그 경계와 그 안의 공동체성을 관리할 수 있었다. 방송 주파수 도달 범위를 인위적으로 제한했으며, 그를 위해 방송 면허제도를 수립했다. 종이라는 물리적 매체의 ‘물질성’ 역시 국민국가의 지리적 물질성과 대체로 맞물려 돌아갔다. 그러나 인터넷과 글로벌경제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호작용하면서 이 물리적 경계와 관리 가능성을 허물었다. 그에 따라 새로운 문화적 경계가 크고 작게, 넓고 좁게 만들어졌다. 기존 공동체성의 파괴와 중층적 재구성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물리적인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신적인) 삶은 국민국가에 의해 상당 부분 규율된다. 여전히 많은 자원과 가능성이 그로부터 나온다. 그 정치적 공동체가 우리를 억압하는 면이 있고, 그것의 이기성이 지금 절실해지고 있는 전 인류적 삶의 형식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그 국민국가 속의 ‘주권’을 활용하는 것 외에 딱히 대안이 없다. 로컬과 글로벌을 아우르는 중층적 세계국가는 여전히 먼 이상이며, 정말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조건이라서 더 그렇다.
공동체성을 조성·촉진하는 미디어
상황이 이렇다면, 결국 국민국가라는 물리적 삶의 조건과 비교적 잘 어우러지는 미디어 생태계가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는 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더 지역화된 공동체도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시민적 삶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공동체성도 새로이 구축되어야 한다.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공영방송(혹은 흔히 공중파 방송이라고 부르는 지상파 방송군)이 그 역할을 했다(세계적으로 보나 우리나라의 역사적 경로로 보나 그 편차는 크지만 대체로 그랬다). 영화와 음반, 그리고 도서와 정기간행물 출판 역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방송을 통해 서로 조율되고 증폭될 수 있었던 측면이 크다. 제도화된 공영방송은 1차적으로 국민국가적 공동체성을 형성했고, 2차적으로 지역성과 세계성을 그 안에 담아보려 했다. 크고 포괄적인 공영방송을 통해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기초로 내부의 다양성과 외부의 보편성을 모두 구현해보려고 노력했던 셈이다.

그래서 이제 질문을 던진다. 그런 공영방송이, 그런 허브 역할을 해줄 공영방송이 바람직하고 또 가능한가?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다면, 혹은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금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가? 이건 꽤 오랜 기간 공영방송 연구자로, 정책 제안자로서 살아온 내 개인적 학문 편력을 향해 던지는 자문이기도 하고, 지난 기간 속절없이 망가지거나 하릴없이 방치되기만 했던 관련 정책의 입법 및 행정 담당자들에게 던지는 과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이른바 ‘언론개혁’을 그렇게나 염원하고 또 요구해온 우리 시민들에게 드리는 질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어지간한 나라의 미디어 제도에서 짧게는 지난 50년간, 길게는 지난 100년간 주축을 이뤄온 것은 바로 이 공영방송에 관련되었거나 그것을 매개로 하여 설계된 것들이다. 세상이 바뀌었고, 우리의 공동체성을 조성하고 촉진하는 미디어가 그 결과로 혹은 그것의 원인으로서 바뀌었다면, 이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어차피 미디어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알고 보면 우리의 의지가 투영된 결과물이 아니기에 무얼 딱히 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하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통합은 그걸 바라는 심성과 그걸 지향하는 의지와 그걸 가능하게 하는 역량에 기초를 두어야 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
정준희 (미디어인문학교 해시칼리지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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