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춘추] 성에꽃

2026. 1. 2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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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잎이 모두 떠나버린 정원이 깊은 침묵에 잠긴 일월(一月), 이 불모의 계절에 수확할 수 있는 유일한 식물은 창에 피는 성에꽃이다.

생명은 흙 속이 아니라 싸늘하게 식은 유리창 위에서 먼저 투명한 뿌리를 내린다.

카렐 차페크는 성에꽃이 가난한 이들의 창가에 더 찬란하게 피어난다고 했다.

밖의 정원도 유리창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의 무늬를 짜며 봄을 설계하고 있다는 전언(傳言)이 그 투명한 행간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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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혜 시인

꽃과 잎이 모두 떠나버린 정원이 깊은 침묵에 잠긴 일월(一月), 이 불모의 계절에 수확할 수 있는 유일한 식물은 창에 피는 성에꽃이다. 생명은 흙 속이 아니라 싸늘하게 식은 유리창 위에서 먼저 투명한 뿌리를 내린다. 밤새 밖의 냉기와 실내의 온기가 투명한 경계선 위에서 밀회를 나눈 흔적이 은백색 양치식물의 문양으로 결정(結晶)되는 것이다. 이곳에는 지상의 어떤 정원사도 흉내 낼 수 없는 정교한 식물 도감이 펼쳐진다.

날카로운 톱니바퀴 같다가도 어느 결엔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선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고사리 잎맥이 뻗어 나간 듯한 촘촘한 무늬, 그리고 히말라야의 설산에서나 자랄 법한 예리한 얼음 가시들. 그 투명한 결정체 속에는 오월의 장미보다 더 뜨겁고 치열한 생의 의지가 박혀 있다. 나는 정지된 계절 속에서 피어난 이 정교한 무늬를 마음의 토양으로 부지런히 옮겨 심는다.

카렐 차페크는 성에꽃이 가난한 이들의 창가에 더 찬란하게 피어난다고 했다. 두꺼운 유리와 완벽한 단열은 추위를 막아주지만, 겨울이 보내온 간절한 편지마저 반송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에꽃에게 완벽한 차단이란 결코 도착하지 못한 문장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허술한 문틈이 빚어낸 남루한 결과라 말한다. 그러나 풍요 속에서는 결코 개화할 수 없는, 오직 틈이 있는 삶에만 배달되는 겨울의 선물이다. 삶의 빈틈은 때로 시린 찬바람을 불러들이지만 그 바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맺힐 수 없는 무늬들이 우리 인생에도 분명 존재한다.

창문에 핀 성에꽃을 읽으며 나는 안심한다. 이것은 겨울이 틈새 많은 내 방으로 밀어 넣은, 다행히도 반송되지 않은 편지이기 때문이다. 밖의 정원도 유리창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의 무늬를 짜며 봄을 설계하고 있다는 전언(傳言)이 그 투명한 행간에 숨어 있다. 얼어붙은 흙 아래서 씨앗들이 냉기와 온기를 버무려 봄이라는 문장을 완성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창밖 풍경이 무채색의 적요로 깊어지면, 나는 창가에 앉아 도착한 편지를 손끝으로 매만진다. 유리창은 이미 마음의 정원이 시작되는 비옥한 토양이다. 나는 정교한 얼음의 문장들을 녹여 머잖아 도착할 봄을 기록할 잉크로 삼으려 한다. 하인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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