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애청자로서 김어준에게 보내는 쓴소리

박철 시민기자 2026. 1. 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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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방송은 멈춘다

'겸손은 힘들다'를 애청하시는 분들께

민주·진보 진영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를 애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그랬습니다. 그의 방송을 통해 권력을 의심하는 법을 배웠고, 주류 언론이 놓치거나 외면한 사안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 점에서 김어준이 한국 사회 공론장에 끼친 영향은 분명히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방송을 들으며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 개인적인 감정이나 피로감일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점점 반복되었고, 결국 그 이유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김어준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꾸준히 들어온 한 애청자의 자리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물론 대단히 예민한 주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어준에 대한 평가는 진영 내부에서도 엇갈릴 수밖에 없고, 이 글에 대해서도 찬반 양론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공감의 글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문제 제기로 읽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글을 씁니다.

오직 민주·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스스로의 언어와 방식, 그리고 영향력을 점검하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만큼은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우리가 의존해 온 질문의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는 김어준의 방송을 오래 들은 애청자다. 그의 방송은 한때 나에게 '세상을 다시 보는 창'이었다. 주류 언론이 반복하던 말들, 당연한 것처럼 포장된 권력의 언어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질문하는 시민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이 글은 김어준을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신뢰했고, 지금도 일정 부분 신뢰하기에 쓰는 충고다. 애정 없는 비판은 쉽다. 그러나 애정이 남아 있을 때의 비판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의 김어준 방송은,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힘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가장 큰 자산은 질문이었다. 그는 늘 "왜?"라고 물었다. 그 질문은 권력이 숨기고 싶은 지점을 향했고, 언론이 침묵하던 곳을 파고들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의혹 제기가 아니라, 합리적 추론과 집요한 맥락 읽기에서 나왔다. 그 질문 덕분에 많은 시민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넘어 "의심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라는 감각을 얻었다. 
김어준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질문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질문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점점 열려 있지 않게 되었다. 김어준의 질문은 이제 가능성을 묻기보다, 특정한 답을 향해 설계된 질문이 되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결론의 윤곽이 드러난다. 출연자는 그 결론을 함께 완성해 주는 사람으로 호출된다. 

이때 방송은 토론이 아니다. 검증도 아니다. 그것은 확신을 확인하는 의식에 가깝다. 김어준의 질문에 가장 적합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출연자는 그 답을 조금씩 보강한다.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충분히 탐색되기보다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말로 정리된다. 질문은 있지만, 대답은 하나뿐인 구조. 이것이 지금 김어준 방송의 가장 큰 한계다. 

진행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 답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김어준은 질문자이면서 동시에 해석자이고, 방향 제시자이며, 때로는 판정자다. 그는 출연자의 말을 끌어내는 데 능숙하지만, 그 말이 자신의 문제의식과 어긋날 경우 끝까지 따라가지 않는다. 흐름은 언제나 김어준의 주관을 중심으로 정렬된다. 

이 과정에서 청취자는 스스로 판단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잘 닦인 길 위를 걷고 있을 뿐이다. 정보는 선택적으로 제시되고, 강조와 생략은 특정한 결론을 향해 작동한다. 김어준은 늘 "판단은 청취자의 몫"이라고 말하지만, 방송의 구조 자체가 그 몫을 점점 축소해 왔다. 판단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 방송의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어준은 더 이상 주변부의 문제 제기자가 아니다. 그의 해석은 기사 제목이 되고, 정치적 논쟁의 기준점이 된다. 그는 의제를 설정하는 위치에 있다. 이런 위치에 선 사람의 주관은 더 이상 개인적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 영향력이다. 
방송인 김어준. 나무위키

김어준 방송의 또 다른 특징은 비판의 비대칭성이다. 그는 특정 권력, 특정 진영에 대해서는 매우 집요하고 공격적이다. 그 집요함은 그의 미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기준이 모든 권력에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편'으로 분류되는 권력에 대해서는 질문의 수위가 낮아지고, 의심은 설명으로 대체된다. 문제 제기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유보된다. 

이때 비판은 분석이 아니라 전략이 된다. 김어준은 이를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론장에서 전략은 위험하다. 질문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조정되는 순간, 방송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정치적 해석 공동체가 된다. 청취자는 시민이 아니라, 하나의 팀원이 된다.

권력 감시는 선택적일 수 없다. 권력은 언제나 감시의 대상이어야 한다. 누가 했느냐에 따라 질문의 밀도가 달라지는 순간, 비판의 신뢰는 무너진다. 김어준이 쌓아 온 신뢰가 흔들리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김어준은 여전히 스스로를 '비주류', '탄압받는 외부자'로 말한다. 과거에는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더 이상 변두리에 있지 않다. 그의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규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충분히 자각하지 않는 듯 보인다. 비판을 받으면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틀림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서는 거의 성찰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다. 자신이 권력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  질문도 권력이 될 수 있다. 특히 그 질문이 반복될 때, 특정한 방향으로만 작동할 때, 그리고 다른 질문을 밀어낼 때 그렇다. 김어준의 질문은 이제 하나의 해석 체계를 형성했고, 그 체계 바깥의 말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겸손을 말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진짜 겸손은 "내 질문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열어두는 것이다. 그러나 김어준의 방송에서는 그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의 세계관은 너무 단단해졌고, 그 틀은 거의 수정되지 않는다. 

나는 김어준에게 더 강한 확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확신을 내려놓을 용기를 요구한다. 

그가 다시 질문하는 자로 남기를 바란다. 자신의 프레임을 방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프레임 자체를 질문 받을 준비가 된 사람으로. 출연자가 김어준의 질문에 답하는 구조가 아니라, 때로는 김어준의 질문이 출연자에 의해 흔들리는 구조를 허용하는 방송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공론장은 질문으로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그 질문이 특정한 답을 강요하는 순간, 공론장은 신앙의 공간으로 변한다. 믿음은 필요할 수 있지만, 공론장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으로 유지되는 공간이다. 

김어준의 방송이 위험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질문이 사유를 확장하지 못하고, 생각의 방향을 고정시킬 때, 방송은 계속될지 모르지만, 공론장은 가난해진다. 나는 여전히 그의 방송을 듣는다. 그래서 말한다. 

김어준이 가장 불편해 해야 할 대상은 언제나 권력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사유는 멈춘다. 질문하는 자가 스스로 질문받기를 거부하는 순간, 그 질문은 권력이 된다.

김어준이 다시 질문하는 사람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를 지켜보아 온 한 애청자가 지금 이 시점에 그에게 보내는 가장 솔직한 쓴소리다.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