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치슨라인’ 시대 한국의 안보 보증수표는? [미국 국가안보전략서(NSS)의 덫 ②]

남문희 편집위원 2026. 1. 2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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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로 맺은 동맹’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기술로 묶인 연대’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각오다. 우리의 기술이 곧 우리의 방어선이며, 우리의 초격차가 곧 우리의 주권이다.
1월3일 미국의 공격으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군사시설 푸에르테 티우나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AFP PHOTO

새해 벽두인 1월3일 새벽(현지 시각)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전격 공습해 ‘2025 국가안보전략서(NSS)’에서 천명한 ‘트럼프판 먼로주의’가 빈말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지난 호(제956호)에서 워싱턴을 장악한 ‘냇콘’의 ‘본토 및 서반구 우선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 데 이어 이번 호에서는 안보 테크 복합체 위주로 재편되는 주한미군의 전략을 집중 조명한다.

지난해 말 한반도 안보 지형을 뒤흔드는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평택 주한미군 기지(캠프 험프리스)에서 ‘전차 킬러’로 불리던 아파치 공격헬기 부대(5-17 공중기병대대)가 2025년 12월15일부로 돌연 ‘비활성화(deactivate)’된 것이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이 주도하는 ‘미국 육군 변혁 이니셔티브(ATI)’의 일환으로 단행된 이번 조치는 유인 공격헬기 전력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표방하는 ‘이빨(전투력)을 키우고 꼬리(비용·인력)는 줄이는’ 테크 안보 중심의 전력 재편이 한반도에서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주한미군을 ‘디지털 용병’으로 대체 또는 보완하는 움직임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4년부터 평택과 오산 기지를 중심으로 군사 5G망이 구축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 기존 A-10 공격기(탱크 킬러) 퇴역에 따른 공백을 사람이 타지 않는 감시·타격 무인기 MQ-9A 리퍼로 대체했다. 2025년 9월에는 군산 기지에 제431 원정 정찰비행대가 재창설되면서, 한반도에 처음으로 MQ‑9 리퍼 상시 운용 부대가 자리 잡았다.

2024년 말~2025년 초에는 오산 기지에서 미국판 ‘아이언돔’인 IFPC(Indirect Fire Protection Capability, 간접 화력 방호 시스템) 시험 운용 및 한·미 연합 전시회가 열렸다. 북한의 무인기와 저고도 미사일 위협에 적은 병력으로 광범위한 방어망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2025년 2월 한국에 처음 전개된 아테나-R(Athena-R)은 기존 정찰기들을 단계적으로 대체하는 ‘교량전력(bridging asset)’으로 운용되며, 더 높은 고도에서 더 정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장비들의 도입은 단순한 무기 교체가 아니다. 인적 자원의 소모를 줄이고 AI와 자동화 장비로 전장을 통제하려는 미국의 ‘군 현대화 전략’에 따른 것이다. 당연히 피터 틸, 안두릴(창업자 팔머 러키), 일론 머스크 등 이른바 ‘테크 안보 복합체(Tech-Security Complex)’와 깊이 연관된다.

1월3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사저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오른쪽), 존 랫클리프 CIA 국장(왼쪽)과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체포 작전을 지켜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Photo

미군 기지에 구축되는 군사 5G망과 감시 데이터는 피터 틸이 창업한 팔란티어(Palantir)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분석된다. “병력을 보내는 대신 데이터로 전장을 장악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주한미군 기지는 데이터 수집의 최전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팔란티어의 고담(Gotham) 프로그램은 ‘디지털 체스판’이라 불리며 현대전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위성사진, 상업용 드론 영상, 소셜미디어(SNS) 게시물, 감청 데이터, 심지어 일반 시민들이 앱으로 제보한 적의 위치 정보 등 흩어져 있던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 러시아 군의 이동 경로뿐 아니라 러시아 지휘부와 포병 등 가치 있는 표적의 위치를 높은 정확도로 추적해 드론·포병 타격으로 연결하면서 ‘AI 전쟁’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보인 실전 성과는 보수적인 미국 국방부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미국 국방부는 AI가 드론과 위성 영상을 분석해 자동으로 표적을 식별하는 ‘메이븐 프로젝트’의 고도화를 위해 팔란티어와 수조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팔머 러키가 창업한 안두릴(Anduril)은 IFPC 시스템과 무인기 방어 솔루션의 핵심 하드웨어를 공급한다. 이들은 ‘소모 가능한 저비용 드론과 자율 방어 시스템’을 강조하는데, 이는 주한미군의 인력 감축을 기술로 보완하려는 밴스와 콜비의 논리와 완벽히 일치한다.

일론 머스크는 군사 통신망의 백업이 될 스타링크와 정찰위성 체계를 제공한다.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 진행된 대담 동영상(2025년 2월8일자 스트리밍)에서 미래 전쟁은 ‘드론과 AI가 전부인 전쟁’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머스크의 말대로라면 향후 주한미군은 ‘보초 서는 병사’가 아니라 ‘드론 군단을 통제하는 기술 장교’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즉 미국은 한국에도 ‘사람’을 보내는 대신, 피터 틸의 ‘눈(데이터)’과 안두릴의 ‘방패(IFPC)’, 머스크의 ‘신경망(5G·위성)’을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빨 강화론’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2기 초반인 2025년 2월12일 ‘국방 혁신 가이드라인’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제시한 ‘꼬리는 자르고 이빨을 강화하라’는 지침은 테크 체제로의 국방 전환에 불을 지폈다. 국방부 고위 관료들과 피터 틸 등 테크 자문역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그는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싸우지도 않는 관료들과 비싼 병사들을 유지하는 데 국력을 낭비해왔다. 이제 ‘꼬리(행정·보급·병력 유지비)’를 과감히 잘라내고, 그 돈을 실제 적을 타격할 ‘이빨(최첨단 무기·AI·무인 체계)’을 강화하는 데 써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비싼 병사들(꼬리)’을 줄이라는 그의 발언은 주한미군 같은 지상군 병력을 철수시키거나 감축할 수 있는 강력한 논거가 된다. 잘라낸 ‘꼬리’의 예산을 피터 틸의 팔란티어나 안두릴 같은 기업의 ‘AI 및 무인 무기(이빨)’에 쏟아붓겠다는 선언이다.

미국 공군의 드론 MQ-9 리퍼가 헬파이어 공대지미사일을 단 채 아프가니스탄 상공을 날고 있다. ⓒAP Photo

트럼프 발언 이후 2025년 4월9일 발표된 행정명령(EO) ‘전략적 국방 획득 및 산업 기반 혁신’은 미국의 안보 패러다임을 ‘병력 상주’에서 ‘기술 투사’로 전환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는 실리콘밸리의 파괴적 혁신가들을 펜타곤의 안방으로 불러들이며, 이른바 ‘안보 테크 삼각동맹’의 시대를 열었다. 피터 틸, 팔머 러키, 일론 머스크로 이어지는 이 동맹은 기존 방산 관료주의를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 분쟁 지역을 인공지능과 무인 전력의 실전 테스트베드로 재편하고 있다.

피터 틸의 팔란티어는 미국 국방부와 약 4억8000만 달러(약 6900억원) 규모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MSS)’ 구축 계약을 체결하며 그 위상을 입증했다. 미군은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검증된 ‘고담’을 인도·태평양 전구로 확대 적용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미군 정보·작전 체계에도 이와 유사한 AI 기반 전장 관리 도구를 점차 이식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앞으로 북한의 미사일 이동식 발사대(TEL)가 움직이는 찰나의 징후를 AI가 포착해 즉각 타격 좌표로 변환하는 이른바 ‘디지털 킬체인’의 심장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안두릴은 자율 요격 드론인 ‘로드러너(Roadrunner)’ 수천 대 규모의 공급 계약을 추진·논의하고 있다. 특히 미국 공군의 차세대 핵심 사업인 (유·무인) ‘협업전투기(CCA)’ 프로젝트에서도 핵심 후보 중 하나로 부상했다. 한반도에서는 오산과 군산 기지를 중심으로 안두릴의 AI 감시망인 ‘격자(Lattice)’ 시스템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인구 감소로 병력이 부족해진 지상군의 경계 업무를 드론과 센서로 대체하여, 미군 병사의 위험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트럼프식 ‘꼬리 자르기’ 전략의 실체다.

일론 머스크의 군사 전용 위성 네트워크인 ‘스타실드(Starshield)’는 미국 우주군과 정보기관이 중점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핵심 군사 위성망 가운데 하나로, 향후 통신·정찰 인프라로서 비중이 매우 커질 전망이다. 스타실드는 기존 상용 스타링크보다 보안성이 극대화된 군사 전용망으로, 지상 통신이 두절된 극한 상황에서도 ‘초저지연 연결(원거리에서도 지연 없이 실시간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 기술)’을 보장한다. 한반도 유사 시 미국 지상군이 증원되지 않더라도, 한국군과 미군의 미사일 방어 체계를 위성으로 실시간 결합해 대응할 수 있는 ‘원격 안보’의 기반이 바로 여기서 완성된다.

HBM3와 안보 테크의 필연적 결합

이들의 기술은 한국군의 고질적 약점을 보완하며 전례 없는 전력 보강 효과를 가져온다. 팔란티어의 ‘고담’은 파편화된 한국군의 감시 자산(UAV·위성·휴민트)을 하나로 묶어, 북한의 미사일 이동 징후 포착부터 타격까지의 시간을 수 시간에서 수분 내로 단축하는 ‘초고속 킬체인’을 완성한다. 안두릴의 ‘격자’와 드론은 병력 자원 감소로 위기를 맞은 휴전선 경계 업무를 AI 자율 무인기가 대체하며, 저비용·고효율의 상시 감시망을 구축한다. 머스크의 ‘스타실드’는 지상 통신망이 파괴된 극한 상황에서도 한국군의 미사일 방어 체계(KAMD)를 초저지연 위성망으로 연결해 중단 없는 방어력을 보장한다.

그러나 위험 요인 또한 경계해야 한다. 팔란티어의 ‘고담’이나 안두릴의 ‘격자’ 시스템에 전장의 모든 데이터를 맡기는 순간, 한국군의 눈과 귀가 미국의 알고리즘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시스템 업데이트를 거부하거나 접속권을 차단하는 것만으로 한반도의 방어망은 한순간에 마비될 수 있다. 유사시 미국은 자국민의 인적 희생 없이 ‘버튼 하나로’ 한반도 상황에 개입하거나 발을 뺄 수 있는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서 발을 빼기가 더 쉬워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역설 때문이다.

2025년 1월7일 ‘CES 2025’에서 관람객들이 SK관의 HBM3E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소프트웨어는 공짜가 아니다. 트럼프와 밴스 등 본토주의자들의 애초 계산은 단순했다. 비싼 미군 병사를 빼고, 똑똑한 AI 소프트웨어를 심으면 돈도 아끼고 안보도 지킨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한 치명적인 사실이 있다. 피터 틸의 ‘고담’이나 안두릴의 ‘격자’ 같은 AI 병기들이 찰나의 순간에 적을 식별하는 ‘초저지연 데이터 처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만 대의 서버가 24시간 돌아가는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미군 주둔비를 아끼려고 테크 안보를 도입했는데, 정작 그 테크를 가동하기 위해 미국의 글로벌 빅테크들이 한국 땅에 수조 원짜리 데이터센터를 짓고 직접 들어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한국이 고대역폭 메모리(HBM3급) 공급망에서 점유하는 압도적 비중이 존재한다. AI 기반 안보 시스템의 성능은 단순히 연산장치(GPU)의 계산 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방대한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불러오고 되돌려 보낼 수 있는지, 즉 메모리 대역폭과 지연 시간이 전체 체계의 병목을 좌우한다. 이 병목을 완화하기 위해 데이터를 병렬로 처리하는 핵심 부품이 HBM3급 고대역폭 메모리이며, 이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역할을 현재로선 대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미군이 핵심 데이터를 본토 등 다른 지역에 두고 한국엔 작은 규모의 ‘에지 센터’만 두거나 여러 동맹국에 다중 거점을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사일 방어, 무인기 통제, 실시간 표적 식별 등의 임무에서 ‘초저지연’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강조될수록 미국 측은 HBM3 공급망(한국)과의 물리적 거리를 최우선 순위로 데이터센터를 설치해야 하는 유인을 갖게 된다.

이 지점에서 본토주의자들의 초기 계산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병력은 철수시키면 그만이지만,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HBM은 한번 엮이면 쉽게 이동시킬 수 없는 고정자산이 된다. 만약 이런 체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미국이 한국을 전략적으로 포기하기 힘든 구조가 구축된다. 병력을 줄이되 기술은 남기는 전략이, 역설적으로 한국을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포기하기 어려운 구조물, 다시 말해 동북아의 하나의 디지털 요새로 굳혀버리는 셈이다.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이제 군사 지정학보다는 기술에 있다면 그 기술을 미국에 이식시키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당연히 들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생사가 걸린 일이다. 따라서 한국과 타이완 기업들의 ‘무조건적인 미국 생산 확대’에 대한 경계와 거부감은 이미 공표된 수준이다. 하지만 지난 1월15일 미국과 대만이 전격적으로 타결한 반도체 협상으로 유동적인 상황이 조성됐다. 양측의 합의는 파격적이다. 미국이 대만에 대한 관세율을 20%에서 15%로 내리는 대가로, 대만은 약 740조 원(5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신용 보증을 약속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관세 쿼터제’다. 미국은 대만 기업이 현지에 공장을 짓는 동안 생산 능력의 2.5배까지 대만산 반도체에 무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완공 후에도 1.5배까지 무관세 혜택을 유지한다. 지난해 힘겹게 관세 협상을 타결한 우리나라로서는 당혹스러운 결과다. 미국 상무장관이 “미국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100% 관세를 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황에서, 한국은 다시 한번 ‘관세 불확실성’ 앞에 섰다.

 이번 협상의 핵심은 그동안 대만이 기술 유출 우려로 금기시됐던 2나노(nm)급 이하 최첨단 공정을 미국에 건설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TSMC는 애리조나에 최대 6개 팹을 건설하고, 최신 2나노미터급 및 그보다 더 미세한 첨단 공정 생산능력의 약 30%를 미국에 배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대만 안보의 최대 무기인 ‘실리콘 방패’를 미국에 상납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만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보’와 ‘경제’를 모두 잡기 위한 고도의 이중 전략이다. 대만은 여전히 첨단 공정을 본토보다 한 세대 늦게 이전하는 ‘N-1 전략’을 고수한다. 미국에서 2나노 공정이 돌아갈 때 대만은 이미 1.4나노나 1나노 양산에 들어가는 식이다. 가장 수율이 높고 성능이 뛰어난 ‘최초의 기술’은 반드시 대만 마더 팹(Mother Fab)에서 먼저 완성된다. 미국 공장은 검증이 끝난 기술을 복제하는 ‘양산 기지’ 역할을 할 뿐이다. 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VIP 고객들이 신제품 출시를 위해 대만 본토 라인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만은 공장 건설을 통해 미국을 대만 안보의 직접적 이해당사자로 만들었다. 반도체 산업의 복잡한 상호의존성 때문이다. TSMC 미국 공장은 대만 본사의 부품과 엔지니어링 지원 없이는 가동이 불가능하다. 만약 대만 해협에 위기가 닥쳐 본사가 마비되면 미국 내 공장들도 수백조 원짜리 고철 덩어리가 된다. 미국은 자국의 빅테크 기업들과 막대한 보조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만의 안보를 최우선 순위에 둘 수밖에 없다.

  미국과 대만의 반도체 협상 타결 이후 우리 정부가 우선 쓸 수 있는 카드는 지난해 11월 발표된 한미 관세 협상 공동팩트시트(Joint Fact Sheet)다. 당시 양국은 “반도체와 반도체 장비에 부과되는 어떠한 관세에 대해서도, 한국은 향후 다른 주요 경쟁국과의 합의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no less favorable)을 부여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즉, 대만이 이번 협상에서 미국으로부터 받은 혜택에 준하거나 그보다 나은 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명문화된 권리를 이미 확보해 둔 셈이다. 그 밖에도 장기 투자 로드맵 성격이 강한 TSMC의 신규 투자 규모와 우리 기업들의 대미 투자 액수를 정밀하게 비교하며, 한국이 이미 미국 경제와 공급망에 기여한 바를 적극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그럼에도 미국이 대만의 선례를 들어 “HBM 같은 첨단 공장을 미국에 직접 지어야만 관세를 완전히 낮춰주겠다”며 우리 기업들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계속 자극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대만의 사례를 거울삼아 ‘역발상 전략’을 펼칠 필요가 있다. 대만의 입장 수정이 “안보를 위해 기술의 일부를 공유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이었듯, 우리 역시 “공급망과 공장을 제공할 테니, 그 대가로 한미 원자력 협정 전면 개정(핵잠수함 연료 확보 등)이나 더 파격적인 테크 안보 자산 공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관세 몇 퍼센트를 깎는 협상을 넘어, 기술을 매개로 국가 안보의 급을 높이는 고도의 수 싸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로 맺은 동맹’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기술로 묶인 연대’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각오다. 미국 안보 테크를 활용하되, 핵심 알고리즘·데이터 저장소는 한국이 통제하는 ‘이중 구조’를 만들고, 반도체·HBM 수율 데이터와 공정 레시피는 어떠한 형태로도 양도하지 않는 ‘레드라인’을 법제화하며, 데이터센터에 대해 한국이 정기 보안 감사권을 갖는 제도적 장치를 동맹 협정에 포함하는 방안 등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국의 초격차 기술이 빠질 경우 미국의 안보테크 생태계가 심각한 성능 저하와 비용 폭증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기술에 비대칭적 의존관계를 유지하도록 초격차를 벌리는 것, 그것이 신애치슨라인 시대에 쥐어야 할 가장 강력한 안보 보증수표다. 우리의 기술이 곧 우리의 방어선이며, 우리의 초격차가 곧 우리의 주권이다.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주권을 수호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일입니다.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할 때 세계는 가장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장려할 것입니다.” 2025년 12월5일 미국 백악관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서(NSS)의 한 구절이다. 앞으로 미국도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길 테니 동맹도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이다. 냇콘(국가보수주의자)이 장악한 워싱턴이 그리는 동맹관계의 ‘아름다운 미래’다. 더 이상 동맹에 관대한 미국은 없다. 동맹도 계산할 건 계산하고 따질 건 따질 각오를 해야 한다.

남문희 편집위원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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