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여행자] 험난한 길 위에 놓이더라도

하은정 기자 2026. 1. 20.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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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베란다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길 위를 헤매고 있을 모든 오래된 여행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가끔 험난한 길 위에 놓이더라도 흔들리지 않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기를.
사진 최윤성 

[우먼센스] 2020년 12월 24일. 나는 코로나는 곧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안고 무작정 인도 리시케시로 들어갔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인도의 코로나 상황은 무시무시했지만, 못 가게 하니 오히려 더 가고 싶어졌다. 인도에 도착한 후 혼자만의 자가격리를 하느라 숙소에서 일주일을 보냈고, 그 이후에도 오후 요가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방 안에서 지냈다. 코로나라는 공포가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시절이었다. 밥도 호텔 주방을 사용해 직접 해 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멀리 나갈 일이 없었다. 위층에는 일본인 음악가 친구 호시가 지내고 있었고, 근처에는 요가 선생님도 살고 있어 딱히 적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날도 역시 저녁 요가 수업을 마친 뒤, 혼자 방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쉬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망고, 망고'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니, 호시가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인도식 정장 조끼에 슬리퍼를 신은 채 서 있었다. 내일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본 여행자가 있어 함께 늦은 저녁을 먹기로 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이미 저녁을 먹은 데다 시간은 저녁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종일 방에만 있느니 나가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몇 명의 일본 친구들이 머물고 있다는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은 차가 다니는 좁은 오르막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를 통과해 계단으로 오르는 길은 왠지 모르게 어두침침해 보였다. 이층에 있는 넓은 홀에서는 요가 수업도 한다고 했지만, 복도에는 먼지가 가득한 담요와 의자가 쌓여 있어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삼층으로 올라가자 여행자 몇 명이 머물고 있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몇 개의 방을 지나 중간에 있는 방을 노크하니, 여행자 느낌이 물씬 나는 몹시 마른 사내가 문을 열어주었다.

사진 최윤성 

긴 은발 머리를 하나로 묶고 겨자색 인도 바지를 입은 그는 밝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흔들림 없어 보이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도로를 향한 큰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천장에는 방을 가로지를 정도로 길게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밝은 형광등 불빛 때문에 날아든 날파리들도 개의치 않는 듯, 그는 다리를 꼰 채 누워 우리를 바라보며 세상 편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어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일본인 청년 여행자가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빠른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갑자기 호시의 괴성이 들려왔다. 왜 그러냐고 묻자, 이미 카레와 밥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뒤라는 것이었다. 늘 자유분방하고 세상사에 무심해 보이는 호시는 이번에도 의사소통이 잘 안된 모양이었다. 입을 쩝쩝거리며 배고파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다. 은발의 여행자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신문지에 싸인 커다란 파파야와 과도를 꺼냈다. 침대 위에 신문지를 펴 쟁반 삼아 파파야를 깎기 시작했다. 껍질과 씨앗은 옆 휴지통으로 무심히 들어갔고, 플라스틱 그릇 하나를 화장실에서 씻어 파파야를 담아 우리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름다운 주황빛을 띠는, 알맞게 익은 파파야는 달콤했다. 배가 고팠던 호시는 연거푸 파파야를 집어 먹었고, 잘생긴 청년 여행자는 은테 안경을 고쳐 쓰며 한입 베어 물었다.

은발의 여행자는 다음 날 리시케시 북쪽에 위치한 마날리로 떠난다고 했다. 히말라야 산속에 자리한 온천 마을 마날리는 리시케시에서 버스로 16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키 큰 소나무가 솟아 있고 개울 소리가 들리는 마날리는 공기 좋고 온천도 있어 휴양지로는 훌륭하지만, 날씨가 꽤 추워 보통 5월이 되어야 날이 풀린다. 아직 한겨울인 지금, 굳이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특히 리시케시에서 마날리로 향하는 '지옥의 로컬 버스'를 여행팀 인솔로 여러 번 겪어본 나로서는, 다시 가라고 하면 절대 가지 않을 길이기도 했다.

사진 최윤성 

그가 머물던 호텔은 주인이 바뀌며 낡은 건물을 새로 꾸미기 위해 모든 투숙객에게 나가 달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그는 이 기회에 온천이 있는 마날리의 바쉬싯 마을로 가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언제 인도에 들어왔느냐고 묻자, 인도를 오래 오간 여행자라고 했다. 이번에는 2020년 3월, 코로나가 막 시작될 무렵에 인도로 들어왔고, 락다운 기간 동안 델리에서 발이 묶여 무더운 여름을 작은 숙소 안에서 4개월이나 보냈다고 했다. 델리 메인 바자르 지역은 늘 여행자들로 붐비는 곳인데, 그곳에서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지냈다니 믿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왜 인도에 머무느냐고 묻자, 옆에 있던 잘생긴 청년이 대신 "아이 러브 인디아 소 머치"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나에게는 왜 인도에 왔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인도에 온 지 두 달쯤 되었다고만 답했다. 사실 나 역시 인도를 오간 지 15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여행자였지만.

위층에 머물던 호시와 나는 10년 전 이곳 리시케시에서 요가를 하며 만난 사이다. 호시는 우리가 알게 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며 옛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 인도를 오가며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이미 백발이 된 채 인도에서 오래 머물고 있는 은발의 여행자, 무거운 악기와 스피커를 들고 다니며 연주하는 호시,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또 다른 청년 여행자, 그리고 나까지.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떠돌고 있는 오래된 여행자들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베란다로 통하는 뒷문을 열고 나가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크고 밝았고, 꺼끌꺼끌한 표면이 느껴질 만큼 선명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달을 향해 합장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와 호시, 은발의 사내, 아직도 길 위를 헤매고 있을 모든 오래된 여행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가끔 험난한 길 위에 놓이더라도 흔들리지 않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기를.

글쓴이 최윤성 '망고 요가 트래블'의 1인 여행 기획자. 국내외 요가 여행을 진행하고, 틈틈이 산티아고 순례길 인솔을 한다. 겨울에는 인도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만들며 생활하는 여행자로 살고 있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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