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참여작가 다시가 추구한 '참여'와 '예술'

최윤필 2026. 1. 20.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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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연극'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1919~21) 베테랑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출신 지방공무원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포그롬(유대인 학살)' 난민 어머니의 딸로 193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런던의 아일랜드계로서, 또 30~40년대의 유대계로서 겪어야 했던 갖은 차별 속에서 어린 그는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일찌감치 예감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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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극작가 마가레타 다시(Margaretta D’Arcy, 1934.6.14~2025.11.23)
마가레타 다시는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종교-젠더 권력 등 강자의 불의와 억압에 거의 평생 삶과 예술로 저항한 아일랜드 극작가다. 그는 잉글랜드의 국가 폭력에 맞서면서도 IRA임시파 등의 테러에 반대했고 유화파인 공식신페인당의 가부장 민족주의와도 불화했다. 동료 극작가인 남편 존 아든과 함께 아일랜드 국가 공인 예술가 단체 '아오스다나'의 창립 회원이자 유일한 부부 회원이었지만, 아일랜드 정부와 아오스다나 '문화 마피아'들의 교묘한 문화 검열에 앞장서 맞선 '개인'이었다. 사진은 미국이 아일랜드 민간공항인 섀넌공항을 군사기지화한 데 반발해 활주로 점거시위를 벌이다 실형을 살고 풀려난 직후인 2014년 만 79세의 다시. www.shannonwatch.org

아일랜드 극작가 마가레타 다시가 1988년 3월 수도 더블린 예술위원회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정부(예술위)가 돈을 미끼로 예술을 검열하고 예술가들을 길들이려 한다는 것, 성적인 문제(페미니즘)를 다루거나 가톨릭교회를 비판-풍자하는 작품, 정부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작가들을 보조금 심사에서 배제-차별한다는 거였다.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저 문화권력의 행태와 반발이 이채로웠던 건, 다시가 한국으로 치면 대한민국 예술원 격인 아일랜드 국가 공인 예술가 단체 ‘아오스다나(Aosdana)’의 창립 회원이어서였다. 게일어로 ‘예술적 재능(dana)’을 지닌 특별한 ‘사람들(aos)’이란 의미인 아오스다나 회원들은 ‘공동체의 영혼과 지혜를 책임지는 창조적 소수’로서, 한국의 예술원과는 다른 차원의 명예를 누린다. 예산과 행면에서 정부(예술위) 지원을 받지만 의사 결정 등 운영에선 일절 간섭받지 않으며, 기존 회원 추천과 투표로 선출되는 250명 한도의 종신직 회원 역시 한국과 달리 월 정액 수당과 회의 수당 등 혜택이 없다. 사뮈엘 베케트, 세이머스 히니 등 우리가 알 만한 아일랜드 예술가들이 대부분 그 출신이다.

한마디로 아일랜드 예술계의 상징적 인물이 정부 문화정책에 삿대질을 한 거였다. 다시는 또 돈과 영향력에 홀려 부당한 정부 행태에 협력해온 아오스다나 동료 회원들을 “문화 마피아”라고 성토하고, 침묵으로 묵인해온 다수를 “황금 감옥의 죄수들”이라 비판했다. 다시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드물겠지만 그는 1970년대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과 80년대 초 '사형수 김대중' 구명운동에 동참한 바 있고, 유럽 특히 20세기 영국-아일랜드-북아일랜드 분쟁 현장에서 국제 평화와 반제국-민족주의, 여성 인권 등 여러 이슈에 걸쳐 여러 차례 옥살이까지 하며 독하게 싸워온 예술가로 유명하다.
그에겐 시위도, 아니 생애 자체가 한편의 행위예술-연극이었다. 그는 약 6주간의 시위 기간에 응원하러 온 여러 분야 예술가들과 시민, 문화단체 회원들의 동조 시위와 즉흥 퍼포먼스 등을 영상으로 기록해 그해 말 다큐멘터리(Circus Expose)로 발표했다.
요컨대 그는 동시대 ‘참여 예술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지만, 그의 ‘참여’에 권력은 없었다. 한국처럼 아일랜드 정치도 보수-진보로 엎치락뒤치락해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권력자에게 치대며 너절하게 군침 흘린 적이 없었다. 고발하고 저항하는 삶이 예술과 포개지는 양상을 미학적으로 모색하며 평생 그 공간을 확장하는 데 몰두했던 그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현대판 소작쟁의를 소재로 한 희곡과 연극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70년대의 다시와 남편 존 아든(왼쪽). 다시는 불의와 억압의 역사를 기록-기억하고 분노를 조직화하는 방편으로서의 예술을 지향했고, '정통파' 연극인이던 아든 역시 아내의 뜻을 대체로 존중하며 평생 동지로서 아내 곁을 지켰다. 게티이미지뱅크

그의 ‘삶-연극’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1919~21) 베테랑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출신 지방공무원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포그롬(유대인 학살)’ 난민 어머니의 딸로 193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런던의 아일랜드계로서, 또 30~40년대의 유대계로서 겪어야 했던 갖은 차별 속에서 어린 그는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일찌감치 예감했을지 모른다. 그 예감은 학교도, 사회도, 국가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함께 권력에 대한 본능적 환멸과 저항의식으로 다져졌을 것이다. 10대 시절 런던 대공습이 빚은 공포와 참경은 그에게 애국이란 전쟁 구호의 기만성을 깨닫게 했다. 그의 아나키즘적 성향과 반전-평화주의는 생존을 위한 강박적 토대 위에 세워진 거였다.

전후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주한다. 성당 의례에서 연극의 매력에 눈을 뜬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연극 전공)를 졸업한 뒤 현지 극단에 입단하지만 종교적-가부장적 억압에 진저리를 치곤 53년 다시 셰익스피어-연극의 본고장 런던으로 진출한다. 반상업적 실험극과 노동-여성 인권 등의 메시지를 담은 진보-풀뿌리 연극에 몰두하던 다시는 55년 극작가 존 아든(John Arden, 1930~2012)을 만나 57년 결혼한다. 뛰어난 언어 구사력과 탄탄한 서사 구조로 ‘셰익스피어의 후계자’라 칭송받던 4년 연상의 ‘정통파’ 아든이 다시의 거친 열정에 먼저 빠져들었다고 한다. 분명한 건 결혼 후 아든이 다시의 블랙홀 같은 중력에 더 깊이 빨려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둘은 사뭇 다른 예술관으로 인해 더러 불화하면서도 10여 편의 희곡을 공동 집필했고,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게 될 다수의 연극을 공동 연출했다.

1960년 버트런드 러셀이 주도한 국제반핵단체 ‘100인 위원회’에 나란히 가담했던 부부는 68년 다시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 골웨이(Galway)에 정착했고, 그해 다시는 정통 사회주의 정당인 공식신페인당(Official Sinn Fein)에 입당한다. 신페인당이 북아일랜드 무장(테러) 독립투쟁 노선을 포기하면서 강경파 분파 정당(Provisional Sinn Fein)이 분열하던 무렵이었다. 평화주의자인 다시는 잔류파였지만 군대식 규율과 통제를 중시하던 계급투쟁 일변도의 당과도 자주 불화했다. 페미니스트이자 자유로운 행동주의자였던 그는 72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출당됐다.
북아일랜드 메이즈(Maze)교도소의 IRA 수감자 10명이 목숨을 잃은 1981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단식 투쟁’ 당시, 다시는 벨파스트 얼스터박물관 담장에 붉은색 페인트로 ‘H-BLOCK(단식 사동)’이라 새기는 시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벌금 납부를 거부해 ‘아마 여성 교도소(Armagh Gaol)’에 수감됐다. 그러곤 저 유명한 ‘불결 투쟁(dirty protest)’ 즉 씻기를 거부하며 배설물과 생리혈 등을 감방 철문과 벽에 바르는 투쟁에 동참한다. 불결 투쟁은 78년 메이즈교도소 남성 수감자들이 ‘정치범-포로’ 지위를 요구하며 처음 시작했지만, 아마 교도소 투쟁은 여성들이 겪던 이중의 고통, 즉 성폭력에 준하는 집요한 알몸 수색과 생리대 미지급 등 인간-여성으로서의 존엄을 파괴당하는 실태를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임시파의 테러-폭력 노선에 동조하지 않던 다시는 메어리드 패럴(Mairead Farrell) 등 당시 수감자들과 달리 조직원이 아닌 ‘개인’이었다. 그는 출소 후 “여성의 가장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을 “가장 강력하고도 고통스러운 저항의 도구”로 삼았던 아마 교도소 투쟁을 ‘그들로 하여금 모든 걸 말하게 하라(Tell Them Everything, 1981)’란 제목의 논픽션으로 출간했다. 아일랜드 페미니즘 운동의 신호탄이기도 했던 그의 책은 신페인당 등 공화파들까지 불편하게 했다. 종교-가부장 민족주의자들은 성 자체를 수치스러운 금기로 여겨 여성 수감자들이 ‘성적 피해자’로 인식되는 걸 못마땅해했고, 독립의 대의가 ‘여성 인권’으로 희석되는 것도 거슬려 했다. 다시는 “남성들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투쟁을 그들의 혁명 공식에 넣는 법을 몰랐다”고 책에 썼다.

81년은 ‘그린햄 커먼(Greenham Common) 여성 평화캠프’가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영국 버크셔 그린햄 커먼 공군기지에 미군 핵 순항미사일이 배치된 데 분노한 여성들이 2000년까지 19년간 전개한 비폭력 평화 시위. 초기부터 현장에서 활약한 다시는 ‘여성들의 부엌 해적 라디오(Women’s Kitchen Pirate Radio)’ 채널을 개설, 투쟁 상황과 참가자 인터뷰 등을 영국과 유럽 전역에 방송했다. 당연히 전파법 위반이어서 그는 여러 차례 연행되고 방송 장비를 압수당했지만 끈질기게 방송을 재개했다. 가사노동의 상징적 공간인 부엌을 ‘혁명-저항의 발신지’로 탈바꿈시킨 그의 전복적 투쟁은 ‘팟캐스트’ 등 1인 미디어의 선구적 형태라 할 만했다.
2000년대 초 아일랜드 메이요(Mayo)주 에리스(Erris) 지역에서 전개한 다국적 기업 ‘로열 더치 셸’사의 해상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육상 연결 프로젝트 반대 캠페인 ‘Shell to Sea’ 등 다시가 주도했거나 가담한 활동들은 영국 현대사의 평화-인권 관련 주요 사건 연표와 거의 겹칠 정도였다. 그 활동들은 대개 지역 주민의 일자리 등 이해와 얽혀 있었고, 그린햄 주민들 역시 주둔군과의 불화를 못마땅해했다. 다수에게 다시는 성가신 불청객이었다.

2011년 4월 북아일랜드 경찰청(PSNI) 소속 만 25세 경찰관(Ronan Kerr)이 임시파 폭탄 테러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과거 잉글랜드계-개신교도 일색의 북아일랜드 경찰(RUC)의 억압의 역사를 청산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현지인들을 대거 채용해 재편한 게 PSNI였고, 희생자 역시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였다. 테러리즘 비판-추모 열기가 고조됐다.
그 무렵 열린 아오스다나 총회장에서 다시는 회장단의 기립 묵념 제안을 혼자 거부해 원성을 샀다. 인간적인 예의조차 무시하며 테러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비판. 테러리즘에 누구보다 분노하던 그였지만, 집단적 추모 열기가 ‘경찰’이라는 국가 폭력기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으며 PSNI 역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동조할 수 없다며 “내 평판보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만일 내 행동에 화가 난다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제복을 입혀 죽음으로 내모는 시스템에 분노하십시오.”

1972년 아든-다시의 작품이 명예훼손 시비에 휘말리자 극장 측은 부부 동의 없이 대본 일부를 수정해 상연을 강행했고, 부부는 '부르주아 검열'이라며 자신들의 연극이 상연되던 로열셰익스피어 극장 앞에서, 당시 열 살이던 둘째 아들(Jacob)과 함께 피켓 시위를 벌였다. PA 연합뉴스

물론 그(와 아든)의 본업은 극작-연출이었다. 부부는 홈리스의 삶과 사회의 비정을 다룬 희곡 겸 라디오 드라마 'No Fixed Abode'(1959), 영국 영웅 넬슨 제독을 타 민족(특히 아일랜드)을 압살한 ‘전쟁광’이자 ‘자기애에 빠진 살인자’로 묘사한 희곡 'The Hero Rises Up'(1968), 아일랜드의 현대판 실제 소작쟁의를 모티브로 삼은 ‘밸리곰빈 사건(The Ballygombeen Stratagem, 1972)', 혁명적 노동운동가 제임스 코널리(James Connolly)의 생애를 다룬 장막극 ‘The Non-Stop Connolly Show'(1975) 등 다수의 작품을 공동 집필하고 상연했다.
주류 비평계는 그들, 특히 아든의 후기 작품이 정치적 선동에 치우쳐 예술적 완성도와 미학적 가치를 잃었다고 비판했고, 다른 편에선 그들이 연극의 문턱을 낮춰 살아 있는 연극의 정수를 선보였다며 옹호했다. 유사한 갈등은 부부 사이에서도 잦아, 공연시간만 24시간에 달했던 ‘코널리’ 연극에서 아든은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과 역사적 맥락을 문학적으로 묘사하길 원했지만 다시는 대본이 너무 길고 지루해지면 노동자 관객이 지칠 것이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평론가들은 아든이 다시의 정치적 인질이 되었다고 했지만, 부부 공동 에세이집 'Awkward Corners'에 아든은 다시를 "다분히 관습적인 극작가였"던 자신을 "흔들어 깨워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해준" 사람이라 썼고, 다시는 아든을 "나의 가장 위대한 파트너"였다고 2005년 자서전(Loose Theatre: Memories of a Guerrilla Theatre)에 썼다.
실제 사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렸던 ‘밸리곰빈 사건’ 상연 당시 극장 측(로열셰익스피어 극장)은 부부 동의 없이 대본 일부를 수정했다. 부부는 그 조치가 ‘부르주아 검열’이라며 자신들의 작품이 상연되는 극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75년 아일랜드 운송노조 소유의 '리버티 홀'에서 상연한 '코널리' 공연 땐 그 연극을 후원한 공식신폐인당이 극장 보안 등을 앞세워 관객을 통제하며 당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 하자 극장 로비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부부가 벌인 저 두 건의 시위로 76년 아일랜드 극작가 조합이 결성됐다.

2012년 섀넌 공항 활주로 시위 당시 암 투병 중이던 70대의 다시와 동료 활동가 니얼 패럴(Niall Farrell). PA 연합뉴스

2012년 아일랜드 섀넌 공항 활주로 점거 사건은 다시의 삶-연극의 대미였다. 2003년 테러와의 전쟁 중이던 미국은 민간공항인 아일랜드 섀넌 공항을 중동 파병 및 군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평화 활동가들은 1920년 독립 이후 나토에도 가입하지 않으면서 지켜온 아일랜드의 ‘군사 중립’ 정체성이 훼손됐다며 정부와 미국을 성토했다. 2012년 10월 다시는 동료 활동가(Niall Farrell)와 함께 공항 보안 담장을 넘어 활주로 점거 시위를 감행했다. 유방암 투병 중이던 79세의 그는 재발 금지 서약을 조건으로 풀어주겠다는 법원 제안을 거부, 2014년 1~3월 약 9주간 수감됐고, 6월 다시 시위를 벌여 2주 추가 구금됐다. ‘고령의 양심수’ 다시의 석방을 위해 대규모 석방 운동이 전개됐다. 어머니의 시위 현장을 따라다니며 가족애 못지않게 정치적 연대감을 쌓아왔다는 네 아들도 그 운동에 앞장섰다. 88년 예술위 시위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장남 핀탄(Fintan)은 어머니의 수감 생활과 옥중편지 등을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실시간 공개했다.
출소 직후 다시는 국립 골웨이대가 이스라엘 군사 과학기술의 요람인 연구 중심대학 테크니온(Technion)과 맺은 연구협력 프로젝트를 비판하며 2012년 골웨이대가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증과 가운 등을 모두 반환했다. 절반의 유대인인 그는 평생 이스라엘 정부의 시오니즘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다시는 2024년 한 동물권 단체(Sentient Rights Ireland)의 요청에 응해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영국 시인 바이런의 '나쁜 매력'을 묘사하는 일종의 관용구인 ‘Mad, Bad, Dangerous' 즉, 광기의 열정과 물불 안 가리는 투쟁, 위협적인 투지였다. 2025년 대선에선 생애 처음 현역 정치인인 노동계급 출신 무소속 여성 후보 캐서린 코널리(Catherine Connolly)를 공개 지지했다. 대통령 코널리는 그가 숨지기 약 2주 전 병실을 찾아 동지적 우애와 격려를 전했다.
그는 파킨슨병과 합병증으로 숨졌고, 유언에 따라 시신은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다. "비범한 신념과 급진적 진정성, 독보적인 목소리"였다는 대통령의 애도를 비롯, 수많은 문화예술계 및 개인 단체의 애도와 헌사가 쇄도했다. 그중에는 88년 예술위 광장에서나 2012년 섀넌 공항 활주로에서나 그의 곁에 없었거나 등을 돌렸던 이들도 없지 않았다.

소수의 급진주의자 덕에 온건한 진보 진영이 득을 보는 경향을 가리켜 담론가들은 ‘급진 대비 효과(Radical Flank Effect)’란 말을 만들었다. 물론 과격-급진주의의 폐해가 적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 덕에 ‘오버턴의 창(Overton Window)’ 즉 특정 이슈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정치-정책적 가능성이 확장되기도 한다. 광의의 동지들 사이에서도 거의 평생 환대받지 못했던 다시의 삶-연극이 추구한 바가 어쩌면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늘 폭풍 속에 혼자 섰고, 그 덕에 아일랜드 정치와 종교, 여성 인권은 폭풍의 가장자리에서 조금씩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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