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의 e스토리] 페이커와의 5분에서 읽은 '페이커의 시대'

2025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우승 후 '페이커' 이상혁은 바쁜 일정을 보냈다. 매해 겨울 바쁜 일정을 보내는 페이커지만, 작년 겨울은 페이커 스스로는 물론 이스포츠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작년 소속팀인 T1과 4년 연장 계약을 맺은 페이커는 중국에서 열린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돌아와 김민석 국무총리와의 대담은 물론 대한민국 체육훈장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수훈했다. 그간 이스포츠가 스포츠인가에 관한 논란을 끝맺는 순간이었다.
2013년 데뷔한 페이커는 데뷔 첫해와 2015년, 그리고 2016년 3회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오브 레전드 이스포츠 최고 선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17년 중국에서 열린 월드 챔피언십 결승에서 0대 3으로 패한 후 네 번의 월드 챔피언십에서 결승에 오르지 못했고, 이를 두고 페이커의 경기력을 의심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데뷔 후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선수가 부진을 딛고 다시 성공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최고에 있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결국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페이커에게도 쉽지 않은 기간이 있었지만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그런 페이커의 모습을 보며 감동과 영감을 얻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렇다면 페이커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래서 2024년 월드 챔피언십 우승 이후 당시 기자 간담회에서 페이커에게 "긴 시간 고난 끝에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른 페이커를 보고 많은 사람이 영감을 얻고 배우려고 할 텐데, 이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도 있다.
그러자 페이커는 고민 끝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내가 팬들에게 주는 영향이라 생각한다.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고 좋은 영향력을 사람들과 나눴으면 한다"고 답했다. 그만큼 스스로도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알고 고민해 내린 답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주 잠시 페이커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 답변을 고민한 이유를 물어보자 페이커는 "내가 한 말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서 답을 고르고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페이커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열린 2023 월드 챔피언십에서 페이커는 "모든 길은 나를 통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길은 페이커를 향하고, 그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페이커다.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 이스포츠 선수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페이커가 개척하는 시대다. 한 국가의 국무총리와 대담을 나누고, 국가의 훈장을 수훈한 이스포츠 선수로 페이커는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먼저 이스포츠 선수로 국무총리와 대담은 물론 훈장 서훈까지 하며 이스포츠의 사회적 위상을 끌어올린 것에 페이커는 "이스포츠는 시대적으로 봤을 때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종목"이라는 생각을 전했고, 이어 "내가 한 역할도 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기에 이스포츠에 관한 인식의 향상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스포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페이커의 역할이 매우 컸음에도, 스스로는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스포츠가 인정받는 상황에서 이를 선도하는 페이커에게 많은 관심과 함께, 자신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페이커는 "이스포츠에서 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스스로 열심히 하겠다는 동기 부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감이 스스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답했다. 흔히 사람의 능력을 '그릇'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과분한 자리에서 오는 책임감으로 그릇이 넘쳐 스스로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페이커는 오히려 이러한 책임감이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페이커는 이에 관해 "최근 시대는 기술의 발전이 급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 선구자의 선례나 책들을 보면 아예 새로운 분야라고 해도 기존의 역사나 인문학적인 지식이 교훈이 되어 과거로부터 많이 배우려 한다"고 답했다. 다양한 정보를 모아 만든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페이커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를 얻는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자신의 판단력을 과신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예를 통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려 한다는 것이다.
이스포츠는 IT 산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승부를 위해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하는 종목이 이스포츠고, 이러한 승리의 이미지를 함께 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이스포츠 대회에 이름을 걸고 있다. 그러한 IT 산업을 이끄는 이스포츠 중심에 선 페이커가 책에서 많은 것을 얻는 이유도 들어보았다.
"이스포츠나 IT 산업은 새로운 분야다. 아예 새로운 것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 페이커의 생각이다. 페이커가 계속 책을 손에서 놓지 않기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모두가 바라보는 위치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것이다. 그리고 페이커의 선수 생활 초중반부터 쌓아온 꾸준한 독서의 결과기도 했다.


작년 월드 챔피언십 기간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T1 기획전을 열었고, 페이커는 물론 당시 동료였던 도란-오너-구마유시-케리아의 도서 소개와 추천까지 있을 정도로 페이커의 독서 습관은 주변을 바꾸고 있었다. 특히 관련 학과에서 대학원까지 마친 입장에서 페이커의 이런 모습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게임과 독서라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요소를 모두 섭렵한 페이커는 과장을 조금 보태어 흡사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통합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에 관해 페이커에게도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아느냐고 물어보고, 페이커가 알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에 비유해 게임과 독서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이전까지 페이커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흔히 말했다. 하지만 이제 페이커에 관해 이야기를 부탁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최고의 위치에서 방심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오히려 긍정적인 동기 부여로 삼는 페이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왜 소속팀과 4년 계약을 했을 때 기뻐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으로도 충분하지만, 페이커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고, 이러한 모습에 많은 사람이 페이커를 믿고 지켜보고 있다. 이스포츠를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그와 5분의 대화는 '페이커의 시대'가 어떤 결과를 보일지 더욱 궁금해지는 시간이었다.
박상진 vallen@fom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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