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그는 히틀러" 트럼프 1년, '저항의 축' 미네소타에 가다

박지연 2026. 1. 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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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저항의 성지' 된 미니애폴리스
ICE 수면 방해 시위 2,500명 모여
친절 화법 '미네소타 나이스' 옛말
러네이 굿 피격 후 살벌해진 민심
학부모들, 학교 앞 ICE 감시 나서
14일 러네이 니콜 굿 피격 장소에서 만난 매튜 웨이(55)는 영하 14도의 날씨에도 꽃과 인형, 팻말과 편지 등으로 뒤덮인 이 장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트럼프는 히틀러다. 외국 영토를 힘으로 빼앗고 말 안 듣는 자국민에게는 테러를 가한다. 이걸 파시즘이라 부른다. 나는 러네이를 기리며 비통해하고, 망가진 이 나라의 미래가 안 보여서 눈물을 흘린다.”

14일(현지시간) 미국 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 트윈시티. 7일 미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의 총격으로 숨진 러네이 니콜 굿 피격 장소에서 만난 매튜 웨이(54)의 목소리는 격앙됐다. 칼바람이 부는 영하 14도의 혹한 속에서도 그는 꽃다발과 인형, 눈에 젖은 편지들이 겹겹이 쌓인 이곳을 뜨지 못하고 10분 넘게 눈물을 흘렸다. 흐느낌이 잦아든 뒤, 코끝이 빨갛게 얼어붙은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히틀러에, 현 정부의 통치 방식을 파시즘에 견주며 트럼프 2기 1년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뜨겁게 분노하거나, 싸늘하게 냉대하거나. 미니애폴리스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둘 중 하나였다. 불편해도 상대에게 기꺼이 웃어 보이는 이 지역 주민 특유의 태도를 뜻하는 ‘미네소타 나이스(Minnesota Nice)’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진보 성향이 뚜렷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오랜 악연을 맺어온 이 도시의 민심은 재집권 이후 몰아친 ‘공포 통치’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벼려져 있었다.

14일 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조지 플로이드가 피격된 주유소 옆 건물 간판에는 앞 단어를 지운 자리에 '피플'이 덧칠돼 '국민의 길(People's way)'이라 쓰여 있다. 텅 빈 근처 건물에는 꽃과 팻말 등이 놓여 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저항의 축’이 된 미네소타, 얼어붙은 거리에 흐르는 긴장감

14일 오후 3시 30분쯤 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최근 ICE는 이곳에서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를 붙잡아갔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한국일보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1년이 되는 20일을 며칠 앞둔 14, 15일 ‘이민 단속과 공포 정치의 최전선’이 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를 찾았다. 미 연방정부와 오랜 갈등을 빚어온 미네소타주는 최근 ICE의 니콜 굿 피격 사건을 기점으로 연방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축’으로 부상했다.

캘리포니아나 뉴욕 같은 민주당 텃밭들도 트럼프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미네소타는 결이 다르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임기 첫해인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성지였으며, 2024년 대선 당시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팀 월즈 주지사가 트럼프를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낸 곳이기도 하다.

얼어붙은 거리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12월 말부터 이어진 폭설 경보로 도시는 거대한 얼음성 같았다. 거리 곳곳에는 치우지 못한 눈더미가 산을 이뤘다. 살을 에듯 추운 날씨였지만, 니콜 굿의 피격 장소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조지 플로이드 추모 광장에도 삼삼오오 발걸음이 이어졌다.


“ICE가 도처에 있다” 공포에 질린 소말리아 커뮤니티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소말리아 커뮤니티 상가 '카멀 몰'. 14일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상점 대부분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소말리아인들을 겨냥한 이민단속을 강화한 뒤 합법적 신분의 상인들조차 노심초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이민 단속의 핵심 타깃이 된 소말리아 커뮤니티 상가 ‘카멀 몰’의 분위기는 침울함을 넘어 살벌했다. 입구는 경비가 지키고 있고, 상인들은 기자를 보자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소리치며 경계했다. 소말리아 출신 부모를 둔 미국 시민권자 압둘 마하무드(37)가 상인들에게 소말리아어로 취재 방향을 전달해준 뒤에야 본보만 가까스로 상가에 진입할 수 있었다. 거친 목소리가 잦아들자 한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코란 낭송이 비로소 들렸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소말리아 커뮤니티 상가 '카멀 몰'에서 만난 압둘 마하무드가 14일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오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상점 대부분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소말리아인들을 겨냥한 이민단속을 강화한 뒤 상인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히잡을 쓴 상인들은 기자를 향해 “ICE가 도처에 깔렸다. 겁에 질려 죄다 문을 닫았다. 범죄자를 잡아가지, 왜 죄 없는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그들에게 기자는 언제든 자신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연방정부 편으로 보이는 듯했다. 소말리아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사업 수완을 높게 평가해 이발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상점을 여성이 운영한다는 게 마하무드의 설명이다.

14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소말리아 커뮤니티 상가 '카멀 몰'의 전통 찻집 입구에 'ICE는 나가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마하무드가 27명의 상인들에게 인터뷰 요청을 전달했지만 대다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젓거나 손사래 쳤다. 유일하게 입을 연 62세 상인은 “미네소타에 사는 소말리아인 약 10만 명 중 복지사기 혐의로 기소된 건 겨우 80명뿐”이라며 “우리 중 95%는 합법적 시민권자이고, 60%는 미국에서 태어나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모범 시민이다. 소수의 ‘썩은 사과’를 핑계로 우리 집단 전체를 범죄자 취급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미리 암기해 둔 듯 수치를 여러 차례 또박또박 읊었다.


자녀 지키는 ‘ICE 감시단’ 삼엄한 학교 앞

'ICE 감시단'을 자처한 학부모들이 14일 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한 공립학교 사거리에서 형광조끼를 입고 쉼 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최근 ICE는 이곳에서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를 붙잡아갔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트럼프식 공포통치의 그늘은 학교 담장 안까지 침투해 있었다. 최근 ICE 요원들이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던 부모를 현장에서 체포해 간 한 공립학교를 14일 찾았다. 학부모들로 구성된 ‘ICE 감시단(ICE Watchers)’은 형광조끼를 입고 호루라기를 목에 건 채 학교 주변 모퉁이마다 2인1조로 포진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들은 “언제 ICE가 나타날지 모른다. 인터뷰하다가 ICE를 놓칠 순 없다”며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하교시간 정문 앞에서 만난 안전담당 교사 애런 세페타는 “학생들이 사건 이후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취재를 삼가달라”고 했다.


ICE 향한 ‘소음시위’

13일 밤 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도시 곳곳에 눈이 쌓여 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미니애폴리스의 저항은 어둠이 깔린 뒤 시작됐다. 13일 오후 10시 30분, 밀 디스트릭트의 사우스 3번가 힐튼 캐노피 호텔 주변은 고요했다. ‘추가 투입된 ICE 요원들을 향한 소음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현지 보도가 있었지만, 본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인적을 찾기 힘들었다.

얼마 뒤 1초 간격으로 귀를 찌르는 나팔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소리를 따라가자 키가 180㎝ 넘어 보이는 긴 머리의 20대 청년이 나팔을 품에 숨기고 황급히 도망쳤다. ‘보도(Press)’라고 외치자 “단속이 뜰 때가 됐다. 빨리 차에 타라”며 얼굴과 이름을 기사에 싣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미 연방정부가 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에 미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을 추가 투입하자 14일 ICE가 투숙 중인 미네소타대 트윈시티 캠퍼스 안 호텔 앞에서 약 2,500명의 대규모 군중이 트럼펫, 드럼, 일렉 기타 등 악기와 양동이 등을 동원해 소음 시위를 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그의 차를 타고 도착한 미네소타대 트윈시티 캠퍼스 내 호텔에는 약 2,500명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해 있었다. 트럼펫, 드럼, 전자 기타가 동원된 거대한 소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빈 페인트통과 양동이를 들고 나온 이들도 보였다. 무대용 전문 조명이 호텔 객실 창문을 향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ICE 요원들의 잠을 방해해 단속할 힘을 빼는 것.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의 이니셜을 얼음(ice)에 비유한 'ICE는 저항 아래 녹는다'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던 여성이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이 대학 졸업생이라는 24세 여성은 “트럼프는 인종 청소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적 서류를 갖춘 사람들까지 백인 우월주의 잣대로 길거리에서 끌고 간다. 이건 국가 폭력이다”고 외쳤다. 복면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시위대는 “사진에 얼굴이 나오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최근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불법 집회를 선포하고 밤사이 30명 이상을 구금한 탓이다.

패트릭(가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한 남성은 “이건 무분별한 권력 남용이다. 하지만 여기는 미네소타다.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연방의 허락 기다리지 마라” 시청에 모인 여성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시청에서 14일 열린 미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 규탄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은 미니애폴리스 시청 소속 인권변호사 네키마 레비 암스트롱(사진 맨 앞)은 “러네이 니콜 굿을 쏜 ICE 요원 조너선 로스를 즉각 체포하라”며 목소리 높였다. 미니애폴리스 시장을 향해서는 “행동 없는 수사적 언어에 머물지 말라. 연방정부의 허락을 기다리지 말고 즉각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이튿날 미니애폴리스 시청에서 열린 ICE 규탄 기자회견에서 시청 소속 인권변호사 네키마 레비 암스트롱은 “러네이를 쏜 요원 조너선 로스를 즉각 체포하라! 시장은 연방정부의 눈치를 보지 말고 즉각 수사에 착수하라!”고 외쳤다. 곁에 선 60여 명은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 시민 케이트 슈리그(48)는 “대낮에 무고한 시민을 죽인 범죄자가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국가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테러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치를 떨었다.

미니애폴리스 시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앞서 만난 케이트 슈리그(48·사진 맨 왼쪽)는 "대낮에 무고한 시민을 죽였는데 정작 범죄자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 연방정부가 무장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데 분노가 치밀어 거리로 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분개했다.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시위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민단속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그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고 입을 모았다. 빨간색 양동이를 품에 안고 숟가락으로 두드리던 한 30대 청년은 “이번 사건의 여파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최소 3년은 더 싸워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14일 미국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 시청사. 미니애폴리스=박지연 특파원

니콜 굿 추모 현장을 떠나던 매튜 웨이는 발걸음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결국 이겨낼 것이다. 역사의 궤적은 결국 좋은 방향으로 끝난다고 하지 않나.” 그의 말은 ‘우주의 도덕적 궤적은 길지만, 그것은 정의를 향해 굽는다’라고 한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연설을 상기시켰다.

미니애폴리스= 박지연 특파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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