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방] 비정형적인 유리의 아름다움 | 전원생활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1월호 기사입니다.

“유리를 가마 안에 넣으면 제 손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가마의 일이죠.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상하지 못한 현상들이 가마 안에서 벌어져요. 우연하게 유리에 패턴이 생기거나, 몰드가 깨져서 유리가 새어 나오기도 하죠. 가마의 열에 의해 유리가 변형되는 것까지 제작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정형과 비정형, 의도와 우연 등이 작품으로 표현되는 거예요.”

그는 작은 컵부터 벽에 거는 액자, 대형 설치작품 등 유리로 표현하는 방식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유리의 비정형성은 그가 폭넓은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근간이 된다. 때론 작품 표면이 거칠거나 스크래치가 있기도 하다. 이 또한 그의 표현법이다.
“사람들이 다 다르듯 예술가도 각자의 캐릭터가 있고 좋아하는 게 있어요.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여기기보다, 모두가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스크바에서의 유학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는 소련의 공산주의가 막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소묘나 조각 같은 기초를 단단히 다졌다. 스테인드글라스와 크리스털 조각 등 유리와 관련된 기술도 익혔다. 4년간의 모스크바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유리를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다. 그는 배움을 향한 열망을 품고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가 6월이었는데, 다들 여름휴가를 떠나더라고요. 빈 도시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돌아다니면서 전시를 보는 거였어요. 그러다 이름도 모르는 학교에 들어가서 유리 작품을 봤는데, 이 학교에서 유리를 배워야겠다 싶었죠.”
그 학교는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이었고, 입학을 위해선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포트폴리오를 쌓아갔다. 맷돌이나 병풍, 달걀 꾸러미 등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유리로 재해석해나갔다. 사물을 단순하게 유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결합해 오브제 작품으로 선보였다. 작품 ‘맷돌’은 곡식을 가는 기구인 맷돌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더해서 표현했고, ‘제24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공예 부문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그때는 해외에서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마땅치 않았던 그는 한국에서 친구들과 떨던 수다가 그리웠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작품에 반영하면서 추상적인 표현이 등장했다. 외형은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었는데, 건축에서 영향을 받았다.
“건축에 관심이 많았어요. 건축과 관련된 책도 자주 접했어요.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건축물을 봤는데, 건축은 볼수록 경이로운 면이 있었죠.”
건축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창문으로 연결됐다. 그가 영국에서 거주하던 집은 아파트였다. 집 안에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아파트가 보였다. 그는 성냥갑처럼 네모난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창문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인 걸 발견했다. 꽉 닫힌 창문, 바람에 커튼이 날리고 있는 창문, 화분이 있는 창문 등 다양했다.
건축과 창문에 관한 관심은 ‘Possibility’ 시리즈에 발현됐다. 작품 ‘Possibility 3’은 네모난 몰드에 유리 조각들을 블록처럼 쌓아서 구성했다. 가마에 들어간 유리 조각들은 녹으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밀리고 기포가 생겼다. 그 변화에서 유리의 동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

영국에서 보낸 시간 동안 그는 작품에 스토리를 담아내는 방법을 익혔다.
“영국에서는 작품을 만들다가 구멍이 나면 왜 구멍이 났는지, 이 구멍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내가 구멍에 이야기를 담아내면 그냥 구멍이 아닌 가치가 생기더라고요.”
“한 지인이 저를 작업실에서 꺼냈어요. 다시 전시를 통해 작품을 선보이게 됐죠. 저는 ‘관계하는 아름다움’이란 이야기를 자주 해요. 저에게 관계라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 작품의 관계나 전시하는 공간과 작품의 관계 등 범위가 넓어요.”
전시 공간에 따라 작품의 크기나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단체전은 개별 공간이 좁다. 좁은 공간에 맞게 작은 컵을 전시했다. 층고가 높은 공간은 컵을 모빌로 변형해 매달았다. 규모가 큰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벽에 거는 작품을 시도했다. 큰 공간을 비어 보이지 않게 디스플레이하려면 벽을 채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캔버스에 작품을 접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벽에 거는 작품은 기존 작품들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이후 벽에 거는 시리즈는 다채로운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올해 정수경은 유리 조형가로서 걸어온 여정을 되짚어보는 전시를 준비 중이다.
유리를 시작한 모스크바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며 전통적인 요소를 연구했던 한국, 유리를 더 깊이 알아간 영국까지. 긴 시간이 응축돼 그를 만들었다.
“모든 과정이 저를 만드는 길이었어요. 사람을 만나고 기술을 배운 것들이 쌓여서 지금이 있는 거죠. 이런 경험을 수평과 수직으로 표현해보려고 해요. 제 작품을 보는 분들이 유리의 비정형적인 부분을 보면서 자유롭게 상상해보면 좋겠어요.”
글 허연선 기자 | 사진 전승 기자, 정수경 제공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