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700쪽 ‘서해 피살’ 판결문에... 北 “기관총으로 완전 없애버려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지귀연)가 지난달 26일 ‘서해 공무원 피살 은폐’ 혐의를 받는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욱 전 국방장관,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등 문재인 정부 인사 5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8일 본지가 확보한 700쪽 분량의 1심 판결문에는 2020년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이었던 고(故) 이대준씨의 실종부터 북한군에 의한 피격·소각 경위, 정부의 대응 과정이 상세히 담겼다. 판결문에는 사건을 바라보는 국정원의 입장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포함됐다.
◇“사망 직전 눈 밑 검게 변해”
판결문에서는 이씨가 북한군에 발견됐을 당시 마지막 상태를 담은 보고 문건 내용이 공개됐다. 해경이 2020년 9월 22일 밤 10시 국정원 첩보를 토대로 작성한 이 문건에는 ‘이씨가 구조·인양되지 않은 채 해상에 떠 있었고, 살아는 있으나 눈 밑이 검게 변해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는 내용이 기록됐다.
판결문에는 이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격·소각된 구체적인 정황도 담겼다. 우리 군이 22일 밤 11시 20분까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우리 (표류자) 잡아서 대충 묶었다” “직접 (기관총으로) 해서 수장시키라는 건가. 완전 없애버리라는 소리지. 지금 연유 뿌리면서 (소각)한다” 등의 대화가 오갔다는 것이다.

사건 당시 군과 국정원 등은 거의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런 첩보와 보고서는 군에서 국정원으로 전파돼 군·국정원 내부 통신망에 공유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23일 새벽 ‘종전 선언 유엔 연설’을 했고, 같은 날 오후 해경은 ‘이씨가 실종돼 수색 중’이라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북한군의 총살 사실을 알린 것은 이씨가 숨진 지 만 하루가 지난 24일 오전이었다. 이후 관련 자료는 ‘보안 유지’를 이유로 서욱 전 장관과 박지원 전 원장 등의 지시에 따라 대량 삭제됐다. 판결문에는 이 같은 삭제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다만 재판부는 서 전 장관과 박 전 원장의 자료 삭제 지시가 사건 은폐와 조작을 위해서가 아닌, 첩보 보호를 위한 보안 조치였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수첩보로 확인된 피격·소각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우리 정보기관의 첩보망과 정보수집에 상당한 피해가 야기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정권마다 ‘월북’ 판단 엇갈려
이 사건 발생 당시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와 해경은 “이씨가 자진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해경은 마지막 3차 발표를 앞두고는 이씨의 인터넷 도박 중독 이력을 근거로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현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대학 교수 등 전문가에게 월북 가능성에 대한 자문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인 2022년 6월 국방부와 해경은 “월북을 단정할 수 없다”며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국방부와 해경 등은 새로운 증거나 자료 확인 등 추가 수사를 하지 않은 채 번복 발표부터 했다”고 판시했다. 이후 국정원도 자체 감찰을 통해 “청와대 안보실 지시(추정)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유엔 연설 등을 감안해 정부에 불리한 사실을 감추려 했고, 국정원도 박지원 전 원장의 지시 아래 이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박지원 전 원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현 정부 들어 국정원의 입장은 다시 달라졌다. 국정원은 작년 6월 특별감사 결과 “윤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부터 ‘집권 세력의 서해 피살 사건 은폐’를 주장하는 등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공격 소재로 집중 활용했고, 대통령 취임 후 해경과 국방부가 과거 입장을 뒤집으며 ‘자진 월북은 근거 없다’고 주장한 것을 시작으로 검찰 수사와 감사원 감사를 동시에 개시했다”고 밝혔다. 특히 국정원은 2022년 7월 김규현 전 국정원장이 윤 전 대통령에게 이 사건 관련 보고를 할 때 작성된 문건에 ‘7.5 09:30 대통령 보고→고발 지시’라는 메모가 수기로 남아 있는 점, 친윤계로 분류되는 검사가 윤 정부 당시 국정원 감찰에 참여한 점 등을 근거로 윤 전 대통령이 직접 박 전 원장 등을 고발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서해 피살 사건 1심 선고 후 국정원은 지난달 29일 박 전 원장 등에 대한 고발 조치를 취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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