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산업 ‘두뇌’는 서울에…본사 부산 와야 해양수도 완성
- 선박·인력 등 실질기능은 부산
- 현장-의사결정 사이 큰 거리감
- 정책 기관도 멀어 효율성 저하
- 해수부 온 뒤 이원화 두드러져
- 항만 키우고 해운본사 모으고
- 런던 등 세계 해양도시 공통점
- 국내 선사도 본사 이전 본격화
- 현장 중심 경영이 경쟁력 토대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으로 국가 해양 정책의 무게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해수부 이전을 기점으로 해양 공공기관의 부산 집적화도 추진된다. 해양 정책 연구, 해운금융, 항만 운영, 해양환경 관리까지 해양 행정과 공공 기능의 큰 축이 부산으로 내려오는 셈이다.

이는 세계 해양도시들이 공통적으로 택한 경로다. 싱가포르는 해양항만청(MPA)을 중심으로 행정과 산업을 밀착시켰고, 영국 런던은 해사행정과 해운 관련 공공 기능을 금융 중심지와 결합시켰다. 행정과 공공의 집적은 해양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부산은 이제 이 최소 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했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행정과 공공은 내려왔거나 내려올 예정이지만, 정작 산업의 핵심 주체인 해운기업 본사는 서울에 머물고 있다. 이 때문에 해양수도 구상은 구조적으로 ‘반쪽’에 머물러 있다.
▮선박·항만은 부산, ‘두뇌’는 서울에
부산항은 명실상부 글로벌 항만이다. 세계 6위권 컨테이너 항만으로 국내 수출입 물동량의 대부분을 처리한다. 선박 입출항, 화물 하역, 터미널 운영, 선원 관리, 수리조선, 포워딩까지 해운사업의 실물 기능은 대부분 부산에 집적돼 있다. 그러나 국내 주요 해운기업들의 본사는 여전히 서울에 집중돼 있다.
대한민국 대표 국적선사이자 글로벌 정기선 시장에서 경쟁하는 HMM의 실질적인 거점은 부산항이다. 원양 컨테이너 노선의 출발과 환적, 터미널 운영, 글로벌 네트워크의 상당 부분이 부산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전략 수립과 투자, 글로벌 협상은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이뤄진다. 해운 현장과 최고 의사결정 간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국내 2위 컨테이너 선사 SM상선 역시 주요 운항 거점은 부산항이지만, 본사는 서울에 있다. 부산항에서의 환적 경쟁력과 노선 운영이 회사 실적을 좌우하는 구조임에도 경영 판단은 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진다. 장금상선 고려해운(KMTC) 같은 중견 컨테이너 선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선박은 부산에서 움직이고, 화주는 부산에서 만나지만, 본사 주소지는 서울이라는 관행이 굳어져 있다.
벌크선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팬오션과 대한해운 등 주요 벌크선사는 글로벌 원자재 수송을 담당하며 국내 항만과 긴밀히 연결돼 있지만, 본사는 대부분 서울에 있다. 철광석 석탄 곡물 등 대량 화물의 하역과 물류가 부산 울산 광양 등 항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도, 전략과 투자 판단은 현장에서 떨어진 곳에서 내려진다. 해운업계 안팎에서는 ‘현장성과 산업 특성이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이원화 구조는 효율성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정책을 총괄하는 해수부와 해운금융을 담당하는 해양진흥공사는 부산에 있는데, 정작 정책 대상이자 협력 파트너인 해운기업 본사는 서울에 있어 물리·심리적 거리감이 발생한다. 정책 협의, 위기 대응, 산업 전략 논의가 상시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구조다.
더 큰 문제는 산업 생태계의 질적 성장이다. 본사가 있어야 투자 판단과 신사업 기획, 글로벌 전략 수립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해운금융 해상보험 법률·회계 IT·데이터 해운중개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이 함께 성장한다. 그러나 본사가 빠진 부산은 여전히 ‘운영 중심 도시’에 머물고 있다. 이는 부산이 해양수도라기보다 ‘대형 항만도시’에 머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만은 크지만, 해운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뇌 기능은 서울에 있는 구조가 고착화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해양도시 롤 모델 삼아야
세계적인 해양도시의 공통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해운기업 본사가 모여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싱가포르는 글로벌 선사와 해운 관리회사, 물류기업의 아시아 본부가 밀집해 있다. 항만 규모뿐만 아니라 해운 의사 결정의 허브로 자리잡았다. 영국 런던은 항만 물동량으로 세계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해운금융 해상보험 해운법률의 중심지로 군림한다. 선주와 금융 보험 법률이 한 공간에서 맞물려 해운산업의 규칙을 만들어 간다.
덴마크 코펜하겐은 세계 최대 선사인 Maersk(머스크) 본사를 중심으로 국가 해운 경쟁력을 키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프랑스 해양도시 마르세유는 수도가 아님에도 CMA CGM이라는 세계 3위 해운선사의 본사가 있다.
이들 도시는 항만만 키운 것이 아니다. 해운기업의 본사를 끌어안으며 산업의 ‘두뇌’를 확보했다. 본사가 모이면 인재가 모이고, 인재가 모이면 혁신이 일어난다. 해양수도는 물동량이 아닌, 의사 결정 능력으로 완성된다.
부산 역시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해수부와 공공기관 이전으로 토대는 마련됐다. 이제는 해운기업 본사 이전을 국가 해양전략의 핵심 과제로 격상시켜야 한다. 단순한 지역균형발전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해운 경쟁력의 구조를 재편하는 문제다.
매출액 기준 업계 7위 SK해운과 10위 에이치라인해운은 지난해 말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한 뒤 이전 작업을 본격화한다. SK해운은 “선박 운용과 화주 대응, 항만·선급·검사 업무의 중심이 부산에 있다”는 점을 본사 이전의 핵심 이유로 제시했다. 실제 SK해운의 선박 운항, 선원 관리, 안전·품질 관리 업무는 대부분 부산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본사를 서울에 둘 이유가 갈수록 약해진 셈이다. 에이치라인해운 역시 본사 기능을 부산으로 옮기며 ‘현장 중심 경영’을 선택했다. 글로벌 벌크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에이치라인해운은 부산항을 거점으로 한 영업·운영 체계를 강화하면서 전략·관리 부서까지 부산에 두는 방향으로 조직을 재편했다. 단순한 주소 이전이 아니라, 의사 결정 구조 자체를 산업 현장에 밀착시키겠다는 판단이었다.
이들 기업의 결정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해운기업 본사는 반드시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통념은 이미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항만과 선박, 선원과 화주, 정책과 금융이 모여 있는 곳이 곧 본사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인식이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 공동 기획: 국제신문, BNK금융그룹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