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에서 서사로…‘여순의 상처’ 다시 쓰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의 삶·기억, 소설로 확장
폭력 역사 속 돌봄·생존 떠안은 여성들 재조명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미경 작가가 두 번째 소설집 ‘맹자야 제발 덕분에(문학들刊)’를 펴냈다.

2022년 첫 소설집 ‘공마당’으로 제3회 부마항쟁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이번 작품집에서 증언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의 형식과 깊이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인다.
정 작가는 첫 소설집에 이어 이번에도 여순사건을 다룬다. 다만 태도는 분명 달라졌다. 사실 전달에 방점을 찍었던 이전의 서사에서 벗어나 이 책에서는 인물의 삶과 감정, 신체에 남은 흔적을 통해 사건을 다시 구성한다. 역사적 폭력이 개인의 일상과 관계, 몸에 어떤 증상으로 남았는지를 소설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인물들은 ‘아픈 여자들’이다. 우울, 섭식장애, 반복되는 가출 같은 신경증적 증상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국가 폭력이 남긴 집단적 트라우마의 결과다. 어머니의 반복적인 가출과 그로 인해 돌봄을 떠맡아야 했던 딸들의 서사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집요하게 보여준다.
표제작 ‘맹자야 제발 덕분에’는 이 소설집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당돌한 아이 맹자는 군인과 ‘산사람’ 사이, 태극기와 인공기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을 온몸으로 통과한다. 산사람들의 강압으로 인민위원장이 됐던 아버지는 국군의 총살로 사망하고,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던 작은아버지 역시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집에는 여자들만 남는다.
그러나 맹자는 울거나 숨지 않는다. 그는 ‘순직’을 자처하며 산과 바위, 나무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다람쥐 새끼’처럼 마을의 소식을 전한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끌려갔을 때 남자 어른들이 갇힌 곳을 찾아다녔고, 때로는 산사람들보다 먼저 달려가 위험을 알렸다. 사람들은 겁 없는 아이를 걱정하지만, 맹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맹자는 단순한 피해자를 넘어선다. 그는 사건을 피하지 않고 보고, 듣고, 기억하는 존재다.
김영삼 평론가는 이 인물을 통해 정미경 소설이 던져 온 질문, ‘과연 객관적 증언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하나의 응답이 제시된다고 평했다. 이데올로기나 권력에 포획되지 않은 채 사건을 기록하려는 맹자의 시선이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소설 말미에서 맹자가 ‘붓’을 물려받는 장면은 젠더와 이념을 넘어 역사를 기록할 미래의 화자를 예고한다.
국가 폭력과 가족의 해체, 여성에게 전가된 돌봄과 희생의 역사 앞에서 독자는 쉽게 안도할 수 없다. 김 평론가는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소설의 현재적 가치라고 짚는다.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오늘의 독자에게 공감과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지난 5년여 동안 10·19사건 증언 채록을 하며 소설의 문법과 미학에 대해 다시 묻는 시간을 가졌다”며 “첫 작품집 이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해 단 한 줄의 소설도 쓸 수 없었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마주한 시간과 그로 인한 멈춤의 시간을 이번 작품집에 담아냈다”고 밝혔다.
한편 순천 출신인 정미경(사진) 작가는 2004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순천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소설집 ‘공마당’을 비롯해 ‘한승원 문학 연구’, ‘문학과 삶’(공저) 등을 펴냈다. 현재 순천대학교 국어교육과 강사이자 순천대 10·19여순연구소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주전남작가회의·순천작가회의 회원이다. 2022년 ARKO문학나눔에 선정됐고, 제3회 부마항쟁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최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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