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읽고 나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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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난 것들은 꽃이 아닌데 꽃이 갈 곳을 잃었다" - '꽃을 들고 거울 속으로' 부분, 임후남 작.
젊다는 것 말고는 가진 것 없는 나.
따뜻한 조명 아래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 아니 그 귀퉁이라도 앉을 수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를 대신 말해주던 가진 것들도 흩어져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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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이상은 현실과 괴리가 컸다. 그 간극을 메우려 애썼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부딪혀보았으나 돌아온 건 틈이 아니라 무력감이었다. 질주하던 걸음은 자주 멈췄다. 멈춘 자리마다 상흔이 겹겹이 남았다. 상처의 시간은 내 사정을 살피며 오지 않았다. 나를 앞에 앉히고 조곤조곤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위로하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떠났고 나는 의지할 곳을 찾았다. 손에 남은 건 시집이었다.
생(生)이 가하는 시련과 좌절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져 있었다. 어두운 심연에서 나를 끌어올린 건 따뜻한 위로도 합리적 설명도 아니었다. 피로 직진하는 수액처럼 시 한 구절이 가슴에 와서 꽂혔다. '절망이 내 삶의 전부'라는 말을 담담히 전하는 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막연히 다른 곳으로 도피를 꿈꾸던 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했다.
삶의 진실과 마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깨우침마저 지적 욕구를 채우려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가 직시한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젊다는 것 말고는 가진 것 없는 나. 그 남루한 모습이 오래전부터 내 인식의 바닥에 깔려 있었다. 나는 점점 소유에 민감해지는 사람이 되어갔다.
따뜻한 조명 아래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 아니 그 귀퉁이라도 앉을 수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찬 바람 부는 바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로의 순간마다 지금 이대로를 선택했다. 다시 피투성이가 되어 그 절박함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절망일지 모른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절망에서 멀어지려 했다. 나를 전복시킨 한 문장은 삶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임시 처방으로 끝났다.
겉에 안주하면 속은 말라간다. 이카로스의 날개는 알게 모르게 녹아내린다. 추락하는 현실 앞에서 나는 설명을 한다. 무엇이,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조목조목. 그러니 부디 내 진심을 알아달라고. 진짜 가진 사람은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들어 주는 이 하나 없다. 결국 혼자 감당할 뿐이다. 그 사이에서 욕망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하는 나는 어느새 설명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누구다'라고 스스로 나를 정의하지 못했다. 나를 대신 말해주던 가진 것들도 흩어져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문제도 해법도 바뀐 세상에서 나의 설명은 더는 통하지 않았다. 찬 바람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몰아쳤다.
나는 누구인가. 외면했던 이 물음은 깨져 본 사람에게서 피어난다.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 이유는 길을 잃은 듯한 감각을 몸에 새기기 위해서다. 어떤 문장을 지나온 뒤에야 그것이 내게 절실한 문장이었음을 안다. 자꾸만 안주하려는 나를 평온한 이 자리를 다시 깨뜨린다. 꽃을 들고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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