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연구원, 밤에는 배우…취미로 ‘번아웃’ 이겨내는 직장인들 [현장, 그곳&]

직장인들이 번아웃을 호소하는 시대, 일상의 소진을 ‘부캐(부 캐릭터)’로 치유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퇴근 후 가방 대신 대본이나 악기를 손에 쥐고 ‘진짜 자신’을 찾아 나선다.
수원 권선구의 한 지하 소극장. 유치원 교사 이수진씨(27)는 이곳에서 ‘선생님’이라는 수식어를 잠시 내려놓는다. 성우를 꿈꾸던 시절의 열정을 잊지 못해 무대를 찾았다는 그는, 유치원 행사가 코앞인 바쁜 일정 속에서도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극단으로 달려왔다. 수진씨는 “직장 끝나고 올 때는 힘들지만 여기서 오히려 에너지를 얻어서 집에 간다”고 말했다.
수원에 한 화학회사 연구원 김민수씨(가명·41)에게 극단은 ‘탈출구’다. 그는 “회사 생활을 하다가 번아웃이 크게 와서 2달 정도 휴직한 적이 있다”며 “그때 술 먹는 동호회들 말고 색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사팀 직원이자 쇼핑몰 운영자, 배우까지 ‘쓰리잡’을 소화하는 김정원씨(46) 역시 이곳에서 숨을 고른다. 낮에는 조직의 질서를 관리하고 밤에는 배역에 몰입하는 고된 일정이지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덕분에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

무대 위에서 대사로 감정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면, 강렬한 악기 소리에 몸을 맡기며 일상의 피로를 씻어내는 이들도 있다. 화성의 한 연습실에서 활동하는 밴드 ‘왓더페퍼’가 그 주인공이다.
밴드의 리더이자 18년 차 직장인 박석용씨(44·삼성전자 반도체 계열)에게 베이스 기타는 ‘자존감 회복제’다. 그는 “요즘 직장에서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일 때가 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역시 나는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아닐 때는 ‘꼭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자존감이 낮아졌을 때 밴드에 와서는 부캐(부캐릭터)처럼 베이스를 치고 멋지게 공연하면서 자신감을 되찾는다”고 말했다.
단순히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넘어, 성장의 즐거움을 찾는 이도 있다. 드럼 담당 김영식씨(39·삼성디스플레이 연구원)는 악기 배우기를 ‘게임’에 비유했다. 노력한 만큼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 눈에 보일 때의 쾌감이 업무의 피로를 잊게 한다는 설명이다.
보컬 양지혜씨(33·삼성디스플레이 연구원) 역시 강렬한 록 사운드에 도전하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을 망설일 이유가 없는 최고의 투자라고 치켜세웠다. 기타 담당 주영욱씨(44·화장품 회사)도 벌써 직장 생활 15년차다. 그는 “회사 업무가 바쁘다 보니까 연습할 시간이 많이 없지만, 2주에 한 번 밴드 연습을 오면 삶의 활력소가 된다”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잡코리아에 따르면 2024년 남녀 직장인 342명을 대상으로 ‘번아웃 증후군 경험’을 주제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69.0%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었다(매우 자주 겪음:19.6%, 가끔 겪음:46.4%)’고 답했다.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방법 중 가장 효과가 있었던 것은 휴가 또는 휴직을 통해 휴식을 취했다는 의견이 응답률 47.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업무 외의 취미활동을 했다는 의견이 41.5%로 뒤를 이었다. 대부분의 많은 직장인들이 자신만의 취미 생활을 찾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바라왔던 꿈을 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신강현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번아웃을 ‘에너지가 고갈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신 교수는 “말 그대로 에너지 소모가 계속되는 것”이라며 “퇴근하고도 회사에서 일을 계속 생각하면 치유가 안 된다. 따라서 직장인들이 취미생활을 갖는 이유는 직장에서 있었던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이는 ‘심리적 분리’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흔히 말하는 ‘부캐’가 도움을 준다”며 “직장에서 말고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이다. 직장인 극단·밴드 등 취미활동에 몰입하면 성취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고 덧붙였다.
서다희 기자 happiness@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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