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
80주년 맞은 국방경비대, 국군 모체 아니야
명칭부터 정체성 논란, 업무 한계도 불명확해
누리집 의하면 육군이 해·공군보다 늦게 출발
부승찬 “국군조직법에 광복군 계승 명시해야”
대한민국 육군은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 연혁의 첫머리에 "해방 후 미 군정하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되어 국군에 편입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이에 따르면 이틀 전 15일이 육군, 혹은 국군의 모체의 탄생 80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렇다 할 행사를 치르지 않았다. 국방부 산하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국방일보가 남조선국방경비대와 함께 출범한 제1연대의 후신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의 창설 80년 역사를 1월13일 소개한 것이 고작이었다.

미 군정 들어서자마자 광복군 등 모든 군사단체 해산 명령
1945년 8월 15일에 맞은 우리 민족의 해방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 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중국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광복군 말고도 일제 징병 피해자들이 결성한 조선국군준비대, 학병동맹, 육해공군출신동지회, 건국치안대 등 크고 작은 군사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미 군정은 11월 13일 군정법령 제28호를 발표해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제외한 이들 단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국방사령부 안에는 경비대 창설을 준비할 군무국과 경찰 업무를 관장하는 경무국을 두었다. 국방사령부는 1946년 국방부로 개명했다.
국군 창설 로드맵 없이 갈팡질팡했던 미국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창설 단계에서부터 갈팡질팡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이나 군정의 청사진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군정청 요원들은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이나 항일과 친일 사이의 갈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군대 창설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미 군정의 무지함과 안이함은 온갖 문제를 낳았다. 군정은 군대 창설에 앞서 한미 간 언어 소통을 위해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군사영어학교에 광복군과 일본군·민주군 출신을 안배해 입교시키겠다는 계획부터 무리였다. 이에 반발한 광복군이 입교를 거부하다 보니 친일 장교들이 주류가 됐고, 미군이 이들을 중용하는 바람에 건군기의 국군이 국민 신뢰와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60명의 첫 입교생 가운데 21명이 40여일 간 교육을 받은 뒤 이듬해 1월 15일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장교로 부임했다.
군정법령에 따라 창설되고 미군의 통제를 받다 보니 갈등도 적지 않았다. 일부 임시정부 요인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경비대를 '미군의 용병'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실제로 1946년 8월까지는 초대 마셜에 이어 2대 러셀 베로스 대령까지 미군이 총사령관을 맡았다.

일본군 출신 득실댔던 남조선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10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78명이 별을 달았고 참모총장 13명, 합참의장 7명이 나왔다. 미처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 60명은 육사 전신인 조선경비대 사관학교로 편입돼 임관했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가 있던 지금의 육사 자리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초대 사령관과 부사령관에는 존 마셜 중령과 광복군 출신 송호성이 각각 임명됐고 만주군 출신 원용덕이 사령관 보좌관을 맡았다.

소련 항의 받고 '국방' 뺀 경비대로 개칭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꿨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대표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군사조직을 창설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해방병단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국방부는 통위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미 군정은 군정법령 86호를 공표해 국내경비부로 개칭했으나 한국 측이 반발해 재조정한 것이다. 통위부는 대한제국 당시 우영(右營)·후영(後營)·해방영(海防營)을 통합한 통위영(統衛營)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도 1945년 10월 12일 모든 무장조직 해산을 명령한 뒤 소련군 출신 조선인을 중심으로 보안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2월과 6월 각각 인민군 제2군관학교와 제1군관학교 전신인 평양학교와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세운 데 이어 그해 8월 15일 보안대를 인민집단군총사령부로 개칭했다. 북한 역시 국방이란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군사 조직을 군정 초기부터 준비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군 지휘권 넘겨받은 것은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가 3대대로 구성된 제1연대 편성을 완료한 것은 1946년 9월 18일이다. 뒤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1995년 익산에 통합), 4연대(광주), 5연대(부산), 7연대(청주), 8연대(춘천)가 각 도에 창설됐다. 9연대는 제주가 1946년 8월 도로 승격된 뒤 그해 11월 합류했다.
1947년 12월 1일에는 1·7·8연대를 주축으로 38선 전역을 관할하는 제1여단이 서울에 창설됐다. 뒤이어 2·3여단도 각각 대전과 부산에서 깃발을 올렸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전까지 5개 여단 15개 연대 규모로 늘어났고 9월 1일 지휘권이 미 군정청에서 한국 정부로 넘어왔다.
9월 5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이름을 바꿔 국방군(국군)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1949년 4월 15일에는 해군 안에 해병대가 신설됐다. 1948년 5월 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항공부대는 육군에 편입됐다가 1949년 10월 1일 독립함으로써 육·해·공 3군 체제의 틀을 갖췄다.
이범석 초대 국방장관 훈령 1호는 경비대 편입

1995년 국방군사연구소가 펴낸 '국방정책변천사'도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어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육군 누리집 설명과 동일하다.
그러나 편입한 주체는 모호하다. 그러면 국군과 육군의 뿌리는 과연 어디인가. 국방경비대 시절 한국 측 인사들은 대한제국 군대에 기원을 두고자 했다. 미 군정이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바꾸려 할 때 통위부를 제안했고, 경비대 초기의 계급이나 구령 등도 대한제국 군대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일제의 강요를 받은 순종의 황명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대한제국 마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사라지면서 그 명맥도 끊겼기 때문에 대한제국 군대가 국군의 뿌리가 될 수는 없다.


해군 '창군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4명은 국군조직법 제1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한국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하고 국민의 군대로서"라는 문구를 추가하자는 개정안을 2024년 10월 14일 발의했다.
법 개정 이전에라도 육군은 누리집을 비롯한 각종 자료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모체가 아니라 독립군과 광복군이 뿌리라는 사실을 밝혀놓아야 한다. 국방부도 국군 출범 이전의 역사를 소개하고 광복군 창설을 기념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육사에 놓인 국방경비대 표석과 기념비에도 '국군(육군)의 모체'란 단어를 빼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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