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연속 우수 법관 선정된 '1호 시각장애인 판사'…"좋은 판단 위해 끝까지 듣는다"
국내 1호 시각장애 판사, 5년 도전 끝 임관
"시각장애 판사라서보단 판사로서 책임감"
좋은 판단이 좋은 사회 만든다는 신념으로
"법관 끝날 때까지 조심스러운 자세로 듣을 것"

지난 8일 오후 1시50분 부산법원종합청사. ‘재판 쉬는 날’인 법정 휴정기였지만, 부산지법 201호 법정 안내판에는 곧 열릴 재판들이 빼곡히 나열돼 있었다. 재판을 맡은 민사3단독 최영(45·사법연수원 41기) 판사는 첫 재판 예정 시각보다 약 5분 앞서 법정에 들어섰다.
그는 부산변호사회가 선정하는 ‘우수 법관’에 2년 연속(2024년, 지난해) 이름을 올린 판사다. 온화한 미소를 띠며 법대(法臺) 뒤에 앉은 최 판사는 차분히 재판을 시작했다. 그의 부드러운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법정을 찾게 될 정도의 갈등에 얽힌 이들은 으레 문제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심하다. 그러니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격하게 대립하는 일이 잦다.
이날 재판도 같은 양상이었다. 세입자와 건물주가 권리금 반환과 밀린 월세 지급을 놓고 완전히 다른 인식을 보였다. 서로의 요구에 타협점이 없었고, 목소리에는 점차 감정이 실렸다. 이들 가운데에서 최 판사는 부드러운 말씨로 대화를 중재했다. 재판 당사자가 말할 때면 그를 향해 몸을 숙이곤 눈을 맞추려 했다. 말 그대로 ‘경청하는 자세’였다. 자신이 말할 땐 당사자가 충분히 이해하도록 느리고 명료하게 말했다. 격해진 당사자가 말을 치고 들어와도, 당장 제지보단 재차 귀를 열어 그의 말을 들었다. 이 사건은 최 판사 중재로 조정이 성립됐다.
당사자들 모두 재판이 끝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최 판사는 시각장애인 법관이다. 2012년 서울북부지법 판사로 임관해 2016년부터 부산지법에서 근무 중이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고를 다녔던 그는 3학년 무렵 자신이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 책을 볼 수 없게 되면서 사법시험 자체를 포기했다.
그러다 시각장애인 동료 학생에게서 ‘듣는 것으로 공부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용기를 얻었다. 결국 5번의 도전 끝에 국내 1호 시각장애인 법관이 됐다. 당시 국가시험은 점자로만 응시할 수 있었다. 그는 법무부에 스크린 리더(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요청, 시험에 합격했다. 장애가 있는 후배들에게 법조인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최 판사는 “언제나 ‘내가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다’고 생각하며 재판에 임한다. 사안을 제일 잘 아는 건 당사자다. 조심스러운 자세로 말씀을 듣는다”며 “눈 맞춤이 안 돼도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과 몸의 방향을 둔다. 시각장애인 판사라 판단을 잘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최 판사가 필요한 내용은 음성변환 프로그램으로 소리로 들을 수 있게 변환된다. 파일화되지 않은 내용은 업무 보조원이 낭독해 최 판사가 필요한 부분을 파일화한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록을 검토할 때도 문자음성변환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일반 음성의 2~3배 속도다. 부산지법도 최 판사의 동선에 점자유도블럭을 깔고 재판 업무 보조인력과 속기 직렬 인력을 채용하는 등 최 판사를 지원하고 있다.

최 판사의 목표는 ‘좋은 법관’이다. 법관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책의 결정자로,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하려면 법관들의 좋은 판단이 모이고 쌓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처음 법관이 됐을 때도 그는 “시각장애인인 판사라서가 아니라 판사라는 직함 자체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수 법관 선정이 방증하듯, 그는 자신의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법리에 밝은 변호사들이 내린 평가라 그 의미도 남다르다. 지역 한 변호사는 “재판은 기록이 전부라고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판사가 자신의 말을 얼마나 귀담아듣는지, 어떤 자세로 자신의 주장을 다루는지, 판사의 말이 충분히 납득되는지를 중요하게 느낀다. 이런 지점에서 최 판사는 당사자들에게 ‘공정하고 숙고된 재판’이라는 신뢰를 주는 법관이다”고 평가했다.
최 판사는 전국 모든 판사가 ‘듣고 판단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겸손을 표했다. 그는 “모든 판사들이 똑같다. 당사자 얘기를 듣고 판단해야 되는 직업이다”며 “그 판단이 당사자들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좋은 영향이라는 건 좋은 판단을 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틀린 판단을 하더라도 항소심 같은 우리 법원 조직 안에서나 조직 바깥의 사회에서 고쳐주는 부분이 있다. 그런 모든 판단이 모여서 좋은 사회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법관 일이 끝날 때까지 조심스러운 자세로 최대한 들을 것이다”고 전했다.
임관 이후 14년간 재판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온 최 판사는 다음 달부터 1년간 미국 연수를 떠난다. 해외에서 ‘견문’을 넓힌 뒤 우리 사회에 좀 더 ‘좋은 판단’이 쌓이도록 기여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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