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58> 한(漢)나라 때의 유협(遊俠)] “필부로서 살생의 권한 훔쳤으니 그 죄 주살을 피할 수 없어”

‘사기(史記)’의 ‘유협열전(遊俠列傳)’에서 사마천(司馬遷)은 한(漢)나라 때 활동한 유협(遊俠·떠돌아다니는 협객)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비록 그 행위가 법망에 저촉될 때도 있지만, 그 의로움과 청렴결백함이나 겸손함은 칭송할 만하다.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고 남들이 괜히 따르지는 않는다. 이들은 무리 지어 위세를 뽐내거나 재물로 가난한 이들을 부리고 폭력으로 연약한 이들을 괴롭히며 멋대로 행동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 뜻을 살피지 않고 난폭한 무리와 같은 부류로 여겨 함부로 비웃으니, 나는 이 일이 매우 슬프다.”
‘유협열전’은 옛 노(魯)나라 지역에서 활동하던 주가(朱家)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배출한 이곳은 유교가 성행했지만, 주가는 유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수하에 수백 명의 용사가 있고 수많은 종을 거느렸지만 늘 겸손했다. 남에게 베푼 바가 있으면 그를 다시 볼까 두려워하고,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을 도왔지만, 생활은 검소했다. 계포(季布)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도, 계포가 존귀해진 뒤에는 평생 만나지 않았다.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그와 사귀기를 원했다.

주가가 계포를 구해준 일은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에 실려 있다. 계포는 항우(項羽)의 부하 장수였다. 항우가 죽은 뒤 유방(劉邦)이 천금을 내걸고 계포를 찾았다. 숨겨주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포고령도 내렸다. 계포는 연고가 있는 복양(濮陽)의 주씨(周氏) 집에 숨어들었다. 주씨는 그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깎이고 목줄을 채워 종의 행색으로 꾸몄다. 그리고 수십 명의 종과 함께 수레에 태우고 가서 주가에게 팔았다. 계포를 알아본 주가는 아들을 불러 밭일은 그에게 맡기고 식사도 꼭 함께하라고 이른 뒤 낙양(洛陽)으로 달려가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을 만났다. 그는 주군을 위해 일하는 것이 신하의 본분인데 계포 하나를 용납하지 못해서야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겠느냐고 설득했다. 이에 하후영의 주청으로 계포는 사면되고 낭중(郎中) 벼슬을 받았다.
전중(田仲)은 검술을 좋아해 유협으로 소문났다. 주가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나 늘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전중이 죽은 뒤에는 낙양의 극맹(劇孟)이 대표적 유협으로 떠올랐다. 낙양 일대에는 장사로 돈을 번 사람이 많았으나 그는 임협(任俠·호방하고 의협심이 투철하여 불의를 바로잡는 의협적 인물)으로 이름을 날렸다. 오(吳)와 초(楚) 지역의 반란으로 세상이 혼란해졌을 때 재상이 그를 얻으면 적국 하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높이 평가됐다. 그의 모친상에는 멀리서 1000여 대의 조문 수레가 왔을 정도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집안에 재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 뒤 각지에서 여러 유협이 활약했으나 경제(景帝) 때에는 사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죄목으로 소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협의 맥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유협의 본보기 곽해(郭解)
곽해(郭解)는 사마천이 직접 만난 적도 있어서 그 행적이 가장 상세하다. ‘유협열전’의 끝에 이런 말이 보인다. “내가 곽해를 보았는데, 그 용모가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했고 말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똑똑하거나 똑똑하지 않거나, 알거나 모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명성을 흠모했다. 유협을 말하는 자들도 다 그를 본보기로 삼았다.”
곽해의 아버지 역시 임협으로 행세하다가 문제(文帝) 때 주살됐다. 그는 몸집이 작으나 다부지고 날렵했으며(短小精悍), 술은 마시지 않았다. 젊을 때는 모질고 사나워 화를 참지 못해 사람 여러 명을 죽였다. 약탈 같은 간악한 짓을 서슴지 않았으며, 사전(私錢) 주조와 도굴도 여러 차례 저질렀다. 그때마다 요행히 벗어나 붙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행동을 조심하여 덕으로 원한을 갚으며 많이 베풀고 적게 바라는 사람이 됐다.
그의 조카가 술자리에서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남에게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려다 화난 상대의 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그의 누나는 동생이 복수해 주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길에 시체를 방치했다. 살인자가 그를 찾아와 사실대로 고했다. 그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한 뒤 돌려보냈다. 이 일로 그는 더욱 인망을 얻었다.
그가 외출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피했으나 누군가가 거만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부하가 그 사람을 죽이려 하자 그가 말렸다. “내가 사는 곳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면 내 덕이 부족한 탓인데 남을 탓할 필요 있는가.”
어느 날엔가는 형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이를 조정에 상소하려고 궁궐 앞에 간 그 집안 사람도 곽해의 부하가 살해했다. 이를 안 황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곽해가 도망쳤다. 추격하던 관리가 그를 붙잡아 진상을 조사하려다 또 피살됐다. 이 죄는 그 뒤 대사령으로 사면됐다.
곽해를 따르는 사람이 관리에게 곽해를 칭송하자, 곁에 있던 한 유생이 “법을 어겨 악행만 일삼는데 뭐가 훌륭하냐”고 비난했다. 이에 그 사람이 유생을 죽이고 혀를 잘랐다. 관청에서 곽해를 붙잡아 문책했으나 그 사람이 종적을 감추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에 관리가 “곽해는 죄가 없다”고 보고하자 어사대부 공손홍(公孫弘)이 아뢴다. “곽해는 포의(布衣)로서 임협이라고 함부로 행동해 사소한 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일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가 죽인 것보다 죄가 크니 대역무도의 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 일로 결국 곽해의 집안이 멸족됐다.곽해가 죽은 뒤에도 임협을 일삼는 자가 많이 나왔다. 그중에는 조신하고 겸손하여 군자의 풍모를 보인 사람도 있지만, 민간에서 발호하는 도척(盜跖)과 같은 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 기록을 보면, 사마천이 곽해와 같은 악인에게 찬사를 보낸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도 상식적인 일반인의 눈에는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마천은 반고(班固)에게 크게 비판받았다. ‘한서(漢書)’의 ‘사마천전’에서 반고는 사마천이 시비를 가림에 있어 성인의 기준에서 많이 어긋나, “유협을 서술할 때는 처사(處士)를 물리치고 간웅(奸雄)을 실었다”고 주장했다. ‘유협전’의 서문에서는 “곽해 같은 무리가 하찮은 필부로서 살생의 권한을 훔쳤으니, 이미 주살을 피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어 “그 행위에 일부 눈여겨볼 만한 면이 없지는 않으나 도덕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류(末流)에서방종하여 패가망신을 불렀으니 불행하지 않은가”라며 안타까워했다.
반고는 ‘유협전’에서 ‘사기’에 있는 주가부터 곽해까지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실은 다음 다른 인물도 다뤘다.
우장(萭章)은 하급 관리였지만 유협으로 명성이 자자해 당대의 권세가까지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와 친분이 있던 환관 석현(石顯)이 권세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수백만 금의 재물을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재물을 받는다면 그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 짓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루호(樓護)는 뛰어난 언변으로 관계에서 평판이 좋았으며 나중에는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의 친구 여공(呂公) 부부는 자식이 없어 나이가 들자, 그에게 의지했다. 그는 친구와 함께 식사하고 아내는 친구의 아내와 식사했다. 그의 처자가 여공을 싫어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친구의 도리를 다하도록 양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평생 친구 부부를 부양했다. 이밖에 구체적인 유협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진준(陳遵)은 술을 좋아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일이 자주 있었지만,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손님들이 찾아와 술을 마실 때면 문을 걸어 잠그고 수레바퀴 축을 고정하는 비녀장인 거할(車轄)을 거두어 우물에 던져버렸다. 취중에 부적절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해 면직된 일도 있다. 결국 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술에 취한 채 목숨을 잃었다.
원섭(原涉)은 20대에 이미 유협으로 이름을 알렸고, 그가 부임한 곳은 저절로 잘 다스려졌다. 원섭은 자신의 숙부가 살해되자 복수를 위해 사직했는데 오히려 지역 호걸이 그의 원수를 대신 죽였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례를 지인의 돈을 거둬 도와주었다. 나중에 누가 그를 간악한 영웅이라고 헐뜯자, 그 가난한 집 아들이 이를 찔러 죽였다. 훗날 그는 또 사람을 보내 자기를 모함한 사람의 목을 베어오게 한 일도 있다. 성격이 곽해와 비슷한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겸손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살기를 품어 원한으로 죽인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자기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에게 붙잡혀 목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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