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의 유가족이 ‘상식’을 묻는다 [사람IN]

나경희 기자 2026. 1. 1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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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이 주목한 이 주의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이야기에서 여운을 음미해보세요.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딸 김애린씨를 잃은 고 김경학씨와 임정임씨 부부의 작업실. 김경학씨가 자신의 호 앞글자인 ‘꿈 몽(夢)’자를 서각으로 새겨넣은 벽면이 보인다. 2025년 12월26일 이곳에서 임정임씨(왼쪽)와 그의 아들 김세형씨를 만났다. ⓒ시사IN 박미소

남자는 한국화를 그리고 여자는 조각을 했다. 미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커플이라기보다 동지였다. “그 시절엔 사귄다는 의미도 몰랐고 사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저한테 엄청 잘해주더라고요. 그건 알았어요.” 남자의 스승은 그에게 ‘몽피’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꿈 몽(夢)에 저 피(彼), ‘꿈 저 너머’라는 뜻이었다. 워낙 욕심이 없고 모든 일을 꿈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딱 알맞은 이름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종종 말하곤 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신부가 됐을 거라고.

몽피 김경학씨와 임정임씨(64·왼쪽)의 첫째 애린은 작디작았다. 몸무게 1.75kg, 정말이지 콜라 병 같은 크기였다. 부부는 몸이 약한 칠삭둥이 딸을 맑은 바람 속에서 키우려고 임씨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남 나주에서 김씨는 비료도 치지 않고 비닐도 씌우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깨복쟁이 배’를 키우며 작업을 이어갔다. 대안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치고, 투쟁 현장에서 폭포처럼 큰 걸개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임씨는 딸에게 종종 말하곤 했다. 아빠 직업을 ‘화가’라 하지 말고 ‘나랏일 하는 사람’이라고 쓰라고.

둘째 김세형씨(28·오른쪽)는 기타를 치는 싱어송라이터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 아들의 밴드 멤버들을 초대해 저녁을 차려주었다. 아들에게 그는 스승이자 예술적 동료였다.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막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 밤늦게 맥주를 사들고 아버지에게 가죠. 요샛말로 꼰대 같지 않으셨어요, 전혀. 동네 꼬맹이들도 ‘몽피’ ‘몽피’ 하고 편하게 말했으니까요.”

부모를 닮아서 그림을 잘 그리던 딸은 기자가 됐다. 딸에게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엄마는 그날 새벽 자신이 꾼 꿈을 떠올렸다. 좋은 집에 깨끗한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고 자신이 그중 제일 큰 의자에 앉던 꿈. 2019년 1월, 딸은 KBS 광주방송총국에서 사회부 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2023년 봄에는 안윤석 목포MBC PD와 결혼식도 올렸다. 부부는 딸아이 부부가 자신들처럼 해로하기를 기도했다. 김씨의 휴대전화에 저장해둔 아내 이름은 아직도 ‘그녀’였다. 딸은 ‘공주’, 아들은 ‘세자’. 배경화면은 성당 앞에서 어린 딸과 뽀뽀하고 있는 옛날 사진. 임씨가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같아. 대학 다닐 때처럼. 꼭 꿈처럼 살았어요.”

2024년 12월29일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임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늘 타이 여행에서 돌아온다던 딸아이 부부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무안공항으로 달려간 임씨는 차를 타고 현장에 들어갈 방법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때는 비행기가 폭발했다는 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전원 사망이라고(181명 중 179명 사망).” 임씨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날 자신이 포기했던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그는 아직도 울음을 삼킨다.

사고가 나고 몇 달 동안은 서로를 보살피지 못했다. “각자의 슬픔이 있으니까요. 세형이하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말을 못하고 서로 피했어요. 진상규명 같은 건 미처 생각도 못하고.” 희생자가 179명이나 되다 보니 유가족 안에서도 의견이 충돌했다. 하루는 무안공항을 다녀온 임씨가 두문불출하던 남편에게 말했다.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씨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정부를 향해서도, 서로 이견을 보이는 유가족 내부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썩은 감자 한 알도 내버리지 못하는 여린 성격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딸을 위한 일이기에 감당했다. 그는 유가족 텐트가 있는 무안공항 2층 대합실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줄담배를 피웠다. 사방이 탁 트인 공항에서 부는 바람은 차갑고 거셌다. 텐트로 돌아와서는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렸다. 주로 다른 유가족을 그린 인물화였다. 진상규명이 끝나면 공항을 나갈 때 그린 그림을 모두 모아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참사 1주기가 다가오자 김씨는 추모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한국작가협회 작가 38명이 힘을 모았다. 시인들이 무안공항에 오면 부부는 현장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하고 식사를 챙겼다. 그렇게 시집 〈보고 싶다는 말〉이 나왔지만 정작 김씨는 그 책을 만져보지 못했다. 2025년 11월19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응급실로 실려간 그는 뒤늦게 간암을 발견했고 불과 나흘 뒤 세상을 떠났다. 임씨는 그에게 약속했다. “몽피, 고생했어. 잘 가. 이제 내가 밝힐게.”

1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유가족의 유가족’이 된 세형씨는 원래 하던 밴드 활동을 잠시 멈추고 올해 상반기에 낼 추모 앨범을 준비 중이다. 밴드 로고도, 앨범 커버도 생전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작품이다. 앨범 제목은 〈다시 12월〉. 그의 바람은 하나다. “상식이요. 좀 상식적으로 하면 좋겠어요. 상식이 뭔지는 다 알잖아요.”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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