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100주년 만해와 설악] 2.시작과 끝, 중심에는 고즈넉한 설악이 있다
속초·양양·고성·인제 4개 시군 포함
신라시대 불교 전래 이후 성지 등극
고려 말~현대 한국 문학 주요 공간
조선 중기 산수유기 성행 문인 방문
백담사 내설악 탐방 거점 자리매김
김시습·김창흡·한용운 인문학 계승
자연 신성성 간직 민족 추억의 장소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밥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해 한용운은 떠났지만 설악산은 여전히 곁에 있다. 설악은 한용운 문학의 출발과 귀결이었고, 고단한 사유가 머물던 영원한 쉼터였다. 그가 삭발염의 후 정식으로 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곳은 설악산 백담사였다. 집필하거나 쉼이 필요할 때는 다시 백담사로 돌아왔다. 금강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감은 외부인의 출입이 어려웠던 험한 산세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의 고향이자 마음의 거점으로 남은 설악은 ‘나룻배’처럼 시간을 통과하며 떠나는 이들을 고즈넉하게 감쌌다.
속초와 양양, 고성, 인제 네 개 시군에 걸쳐있는 설악산은 주봉인 대청봉을 비롯해 700여 개의 봉우리를 지닌 산이다. 북쪽의 미시령과 남쪽의 한계령을 경계로 동해 쪽은 ‘외설악’, 서쪽은 ‘내설악’으로 칭한다. 설악의 유래는 “한가위부터 쌓이기 시작한 눈이 다음해 하지에 이르러 녹기 시작하기 때문에 설악이라고 한다”고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서 기록됐다. 빼어난 절경의 기암절벽과 폭포를 지닌 설악산은 강원인의 정신을 지탱하는 공간이자, 땅의 역사 속 다양한 문화 환경을 만들어냈다.

고려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설악산은 한국 문학의 주요한 공간이었다. 김풍기 강원대 교수는 “설악산의 문화적 배경은 교종에서 선종으로 대체되는 신라말 선불교의 맥락과 닿아 있다”며 “불교와 유교, 근대 관광자원의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공간이 됐다. 세계 어디를 나가도 이만큼 이국적인 공간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선을 방랑한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은 설악산에서 불문에 귀의했으며, 오세암에 머물렀다. 이복원(1719~1792)의 ‘설악왕한일기’에서는 승려가 오세암에 김시습의 초상을 ‘곁방’에 두자, 이복원이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한말 유학자 이유원(1814~1888)도 ‘오세암’을 방문해 김시습의 초상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시를 남겼다.
설악산이 시와 기행문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확산한 산수유기의 성행으로 조선 지식인들이 여행을 경험하게 됐고, 다른 지역을 유람한 후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삼연 김창흡(1673~1722)이 현재의 영시암을 창건하면서 설악산을 방문하는 문인들이 늘어났다. 김창흡의 백부 김수중은 ‘곡연기’ 등에서 김시습을 언급하고 존경하는 행적을 보였다. 김창흡 역시 이러한 집안 풍조에 힘입어 설악산을 김시습의 절개 어린 공간으로 여겼고, 설악산에 머무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의 형 김창협(1651~1708)은 내설악에 칩거하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설악산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설악산을 바라보며 ‘옥을 깎아 세운 듯한 산’이 있다고 감탄했다. 구한말 활동한 춘천 출신 류인석(1842~1915) 의병장도 한시 ‘설악을 읊다’를 통해 ‘눈 덮인 모든 산이 설악산’이라며 설악산의 가치를 조명했다. 김시습과 김창흡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이미지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인제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지만, 그 영향력은 남다르다. 백담사의 전신 한계사는 신라시대인 647년에 개창됐다. 1600년대 후반까지 원래 자리에 위치했던 한계사는 몇 차례의 화재를 겪은 후 사찰 이전과 이름 변화를 겪으며 지금의 ‘백담사’가 됐다. 승려들은 설악산의 잦은 산불에 맞서 사찰의 위치를 5번이나 옮겼다. 물과 관계된 이름으로 사찰명을 바꾸다가 대청봉에서 백 개의 못을 거친 곳이라는 ‘백담’이라는 이름을 짓게 됐다.
설악의 공간성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백담사는 6·25전쟁 때 소실됐다가 1957년 복구됐다. 1965년 천연기념물, 1970년 국립공원 지정과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명실상부한 국민관광지의 자리에 올랐다. 늘어나는 설악산 여행 속 백담사는 내설악 탐방의 거점이 됐고, 1980년대 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은신처로 삼으면서 주목받았다.
설악산 관련 주요 기사로는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설악행각’이 있다. 1933년 동아일보에 10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37회 연재되며, 설악산의 자연미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분단으로 북한에 속했다가 한국전쟁을 통해 수복된 설악산은 1960년대까지 무장간첩 출현과 등반·관광이 함께 이루어지는 복합적 공간으로 기록됐다. 1966년에는 정부의 국립공원 5개년 계획이 발표되며, 설악산은 관광지 개발 붐의 중심지가 됐다. 영동고속도로 개통과 정부의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설악산은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해외여행 자유화와 함께 감소한 수요로 침체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자연의 신성성을 간직한 설악의 공간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를 남긴다. 한 공간에 대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를 기억하는 작업은 유효하다. 불교와 유학으로 시작한 설악산의 인문학적 의미는 ‘참선’의 장이자 사랑의 공간이었다. 도의국사로부터의 인문학적 계승은 일연, 김시습, 김창흡으로 이어졌고, 만해 한용운의 세계로 스며들었다.
만해가 삶의 행적 속에서 설악으로 돌아갔듯이, 설악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강원인에게는 높은 지향을 가리켰던 공간이자, 수학여행을 떠났던 이들의 추억이 어린 장소이다. 다시 만해를 읽는 이에게는 ‘나룻배’처럼 행인인 화자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고향 ‘설악산’이 있다.
김진형·이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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