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슐랭 셰프, 설악 17km 걸어 레인저들 밥해주러 가다 [산악인의 밥상 희운각대피소의 셰프]

'텅 비어버린 부식창고, 혹한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격오지. 제한된 식재료로 고생하는 대원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한다!'
어느 주말, 채널을 돌리다가 한 예능 프로그램의 예고편을 봤다. 백종원이 출연한 '남극의 셰프'다. 머나먼 격오지에서 고생하는 우리나라 대원들을 위해 맛있는 밥을 해주러 찾아간 모양이었다. 일종의 재능기부 같은 기획 의도가 참신하고 뜻깊어 보였다.
그리고 겹쳐 보였다. 혹한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오지에서 고생하는 사람들. 후한 물자 공급도 받지 못하고, 남극 기지처럼 전문 셰프가 상주하지도 않는 곳에서 산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산불 방지 기간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겨도, 이들의 출퇴근은 계속된다. 등산객은 없어도 임무는 있기 때문이다. 설악산국립공원 대피소 레인저들이다. 이들에게도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하는 시간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없어요. 아니, 없어요. 그냥"
'남극의 셰프'의 원래 부제는 '부식창고를 털어라'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대피소에도 많은 재료들이 쟁여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희운각과 양폭 대피소에서 각각 보내준 사진 속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먹어요? 6일 근무 5일 휴무잖아요."
"지금 쌀 한 포대 남았어요. 밥은 먹을 수 있으니 출근할 때 반찬 가게에 들러 6일 동안 먹을 부식을 사서 올라가고 있어요. 헬기 운송이 강풍으로 지연돼서 어쩔 수 없네요. 이제 쌀이 떨어지면 쌀도 들고 올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출근 배낭 무게가 30㎏이다. 순찰과 구조가 언제든 가능하게끔 멀티툴과 의약품부터 아이젠 등 동계 장비, 비상의약품, 환자 수송을 위한 들것, 등반 장비 일체를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그 위에 본인들이 먹을 식량을 더하니 무게가 경악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요리해 줄 셰프를 찾았다. 그간 여러 산꾼을 취재했고, 그중 셰프도 있었다. 요식 업계에서 가장 성수기인 12월 연말에 매출을 포기하고 시간 내서, 험한 산길을 오르고, 빈손으로 요리해 달라는 요청에 다들 손사래를 쳤다. 딱 한 사람은 "재밌겠는데?"라며 반색했다. 김문석 셰프다.

김 셰프는 프랑스 리옹 Lyon의 폴 보퀴즈 Paul Bocuse 학교 졸업 후, 리옹의 기 라소제 Guy Lassausaie(미슐랭 2스타), 알자스 지역의 르 로젠메르 Le Rosenmeer(미슐랭 1스타)에서 근무하고, 귀국 후 청담동 리스토란테 에올을 비롯해 여러 레스토랑에서 활동하다 라피네 오너 셰프를 거쳐 현재 동남 경복궁점 개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게 재료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솔루션을 구했다. 단순명쾌했다.
"재료가 없다고요? 사면 되잖아."
대피소, 늘 첫 끼니는 라면
사진기자는 배낭에 카메라를 넣어야 하고, 셰프는 조리도구를 넣어야 한다. 내 운명을 직감했다. 그래서 배낭에서 침낭도 빼고, 갈아입을 옷도 빼고, 취재 수첩도 뺐다. 그리고 가는 길에 양양의 식자재 마트에 들러서 장을 봤다. 다행히 대피소에 아예 아무것도 없는 상황은 아니라 적당히 벌충하면 됐다. 주재료는 닭. 빠른 조리를 위해 영계로 샀다. 그 외에 이것저것 더하니 카트 하나가 가득 찼다. 그래서 배낭도 가득 찼다. 김 셰프가 자청해서 재료를 나눠 들어준 덕에 숨통이 좀 트였다.
소공원에서 비선대를 지나 희운각대피소로 올라간다. 편도 8.5㎞. 희운각은 해발 고도가 1000m를 넘는다. 원래 같으면 천불동계곡의 아름다움을 수첩에 적고, 역사와 유래를 조사해 기사에 소개했겠지만 이번엔 고개를 푹 박고 그저 헐떡거리며 오른다. 그렇게 도착한 희운각대피소엔 임지선 주임과 오경록 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피소에서 근무할 때 뭐가 제일 드시고 싶으세요?"

배낭 가득 식자재를 산 건 이를 위해서였다.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 또 먹고 싶을지 모르니 이런저런 요리를 다 할 수 있게 기본 재료를 다 구비했다. 이들은 "뭐든지 좋다"를 몇 번 반복하다 "치킨"을 얘기했다. 마침 닭이 있었다. 내심 삼계탕을 생각하고 샀는데 바로 노선을 틀었다. 김 셰프는 '크라포딘'을 떠올렸다. 프랑스어 크라포드(Crapaud)는 두꺼비란 뜻. 주로 닭을 재료로 하며 가슴뼈를 중심으로 반을 갈라 납작하게 편 모습이 두꺼비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요리다. 원래는 오븐으로 익히지만 팬으로도 가능하다.
크라포딘 아래에는 창고에 남아 있던 감자, 고구마를 깔았다. 닭과 함께 구워 닭기름으로 천천히 익힌다. 브리 치즈와 함께 낸 흑토마토 샐러드 위에는 바질 대신 현지 시장에서 산 취나물을 올리겠다고 했다. 순식간에 계획을 세운 김 셰프가 현란하게 요리에 들어갈 때 레인저들과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먼저 음식.
"대피소 첫 출근 때 먹었던 음식 기억나세요?"
둘 다 라면이었다. 대피소 레인저들은 거의 아침을 거르고 첫 끼인 점심을 라면이나 국수로 먹는다. 아침 7시에 매점을 열고, 숙박한 이들이 퇴실을 마치면 청소도 해야 하는 데다 점심은 등산객이 가장 많이 오가는 시간이라 제대로 먹을 겨를이 없다. 그래서 어떤 탐방객은 팬을 가져와 장어를 굽고, 냉면을 끓여 먹고, 회칼을 들고 올라와 사시미를 떠서 먹는 걸 부럽게 쳐다본 적이 있다고 한다.
저녁은 요리다운 요리를 먹는다. 가장 기억나는 걸 묻자 임 주임은 "지금은 퇴직한 선배가 살이 좀 빠졌다면서 낙지와 능이버섯을 사비로 사가지고 올라와 끓여준 전골을 감사히 먹었었다"고 했다. 오 계장은 "속초 토박이 선배가 해준 향토 음식 미역장국. 미역국에 감자, 된장에 고추장이 살짝 들어간다. 첫맛은 낯설어도 익숙해지면 굉장히 맛있다"고 전했다.
대피소에서 요리 시작… 구조대에 '국수죽' 내는 실수도
"저는 대피소에 와서 처음 요리했어요."
임 주임은 피자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어서 요리를 능수능란하게 하지만, 오 계장은 초보였다. 그래도 요새는 초보도 요리하기 좋은 시대다. 유튜브를 보고 따라 할 수 있고, 맛을 강제로 만들어주는 신비의 조미료도 많다. 보통 대피소 직원끼리 먹으니 양도 적당히 하면 된다.
"문제는 단체로 사람들이 올 때입니다. 조난이 발생해서 구조대원들이 출동했다가 내려가는 길에 대피소에 들러 지친 몸을 쉬면서 식사할 때가 있어요. 이분들 밥을 저희가 준비해야 하죠. 한 번은 제가 국수를 삶았는데 면수 양을 잘못 잡아서 국수를 죽으로 낸 적이 있어요. 엄청 죄송했죠. 다들 조용히 일어나서 라면 끓여 드시더라고요."
오이냉국도 망쳤다. 억울한 게, 유명 셰프 유튜브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했는데 너무 신맛이 강했다. 같이 근무하는 선배가 천사표라 "괜찮아, 아깝잖아"라며 먹다가 결국 "미안하다. 못 먹겠다"며 수저를 내려놨단다. 그래도 지금은 요리 솜씨가 좀 늘어서 잡채나 목심구이는 기본이고, 돼지고기가 떨어졌을 때 김치찌개에 닭볶음탕용 닭을 넣어 끓이는 응용도 할 줄 알게 됐다.
"그런데 산불 방지 기간이면 굳이 대피소에 상주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어차피 모든 길이 통제잖아요."
그래도 할 일이 있다. 먼저 산불감시다. 산방기간에 들어간 설악은 몹시 건조해서 작은 불씨가 큰불로 번질 위험이 매우 높다. 담당구역을 돌면서 늘 지켜봐야 한다. 또 탐방로 정비도 한다. 철다리가 무너진 정도가 아니면 직접 공구를 들고 가서 고친다. 대피소도 새 단장한다. 월동 준비다. 동파 방지 조치도 하고, 등산객들이 아이젠을 신고 다니는 것을 고려해 미끄러운 곳엔 고무매트를 깐다. 헬기 작업도 많다. 보통 산방기간에 몰아서 한다. 하늘에서 물자가 내려오면 받아서 옮기고, 정리한다. 특히 희운각은 물건 판매량이 양폭에 비해 7~8배 정도 많아 그만큼 일할 양도 많다. 등산객이 없어도 이리 바쁜데 많을 땐 오죽할까. 그래도 힘든 대피소 근무를 견디는 건 그만한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분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노부부를 구조한 적이 있어요. 1년에 두 번 명절 때마다 연락을 주십니다. 그때 구해 줘서 감사하다고요."
반대의 경우도 있다. 호우 예보가 발령돼 올라온 탐방객을 돌려보내고 있었는데, 한 명이 본인이 기상청보다 날씨를 잘 맞춘다며 비 안 온다고 기다리겠다며 버텼다. 실랑이를 벌이던 탐방객이 홧김에 큰 돌을 들어 오 계장한테 집어 던졌다. 몸을 날려 피해서 다치진 않았다. 던진 이는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내려갔단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요리도 익었다. 식사하기 직전, 이들은 당부의 말 하나를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유튜브로 공룡능선을 보고 오시는 분이 많아요. 영상에는 아름다움만 담겨 있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는 제대로 보여 주지 않죠. 초보라면 금강굴을 통해 올라가지 말고 희운각에서 출발하는 걸 추천합니다. 그게 체력을 안배하기 더 편해요. 모두 안전 산행하세요."
크라포딘 Poulet Crapaudine





준비물
영계 1마리, 소금, 후추, 겨자, 빵가루, 식용유
Step 1
닭 표면의 핏물을 키친타월로 닦고, 가슴뼈를 기준으로 가위나 칼로 반을 가른다. 이어 물로 씻지 않고 키친타월로 내장 일체를 제거한다.
Step 2
소금과 후추, 소량의 고춧가루로 밑간을 한다. 고춧가루를 쓰면 색도 먹음직스럽게 나고 잡내도 제거된다.
Step 3
닭 전체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팬에 식용유를 넉넉히 두르고 뼈 부분부터 열을 가하다가 뒤집어 살을 익힌다. 기름에 버터 한 수저를 넣고 허벅다리와 두꺼운 가슴살 주변에 끼얹어 가며 15분 정도 익힌다. 한 번에 익히려고 하지 말고 3분의 1 정도 익었을 때 꺼내 10분 이상 쿠킹 호일을 덮어 레스팅을 시킨다.
Step 4
레스팅 시 수분이 약간 빠지므로 소량의 소금 간을 해준다. 머스터드는 붓이나 비닐장갑을 이용해 살과 등뼈 모든 부분에 골고루 발라주고 빵가루를 입혀 튀기듯 익힌다. 빵가루는 시중에서 파는 것 외에, 집에 남은 마른 빵을 갈아서 다진 파슬리와 섞어 써도 된다. 또 빵가루와 파마산 치즈가루를 1:1 비율로 섞어도 된다. 바삭함이 조금 떨어지지만 풍미가 좋아진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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