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의 세상 땜질] 비극의 소재로 노동을 사용하진 않겠다

영화 ‘3학년 2학기’를 봤다. 고3 현장 실습생 이야기다. 철저한 현실 고증만으로 빚은 명작이었다. 훌륭한 영화를 보면 여운이 남는다. 시청 후 계속 복잡한 뒷맛이 맴돌았다.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3학년 2학기’는 그간 노동을 묘사한 미디어가 놓치거나 애써 무시하며 평평하게 만든 아스팔트에 싱크홀을 냈다. 사회와 개인, 자본가 대 노동자처럼 케케묵은 도식 대신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사람을 영화에 녹였다. 현실의 현장 실습생 상당수가 대학 갈 형편이 안 돼 일터에 온다. 소년들에게 주어진 노동은 이미 외국인 노동자가 상당수 대체한 단순하고 힘든 일뿐. 여기까지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동시에 이 지점부터 감독의 역량이 나타난다. 미디어가 늘 피해자로만 묘사한 어린 노동자의 세세한 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디테일이 뛰어나서 직접 공장에서 현장 실습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감탄했다.
많은 미디어가 산재로 죽은 현장 실습생만 주목한다. 이들 주도로 열린 추모식은 대체로 입시 위주 교육을 탓하고 중소기업 현실에 개탄하면서 끝. 대다수 현장 실습생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현실은 낄 틈이 없다. 이란희 감독은 달랐다. 현장에 갓 떨어진 남학생의 모습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착하지만 몹시 어수룩한 소년들은 좀처럼 집중을 못 하며 충동에 약하고 사고도 곧잘 친다. 고용주는 참 난감하다. 내버려 두자니 다치기라도 했다간 회사 문이 닫힐 수도 있다. 그래서 주임이며 대리쯤 되는 직급 노동자에게 실습생의 ‘단도리’를 부탁하지만 관리가 쉽지 않다. 본업을 하면서 동시에 사람까지 살펴야 한다.
결국 관리자는 소년들에게 의미 없고 안 다치는 단순 노동만 시킨다. 그 안에서 소년들은 각자 살 방법을 찾는다. 임금이 같지만 훨씬 편한 편의점을 간다. 수익 고점이 훨씬 높은 배달을 하러 간다. 떠나지 않고 남는 선택을 한다 한들 반복 작업에 계속 머물지 않는다. 현장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술을 배우려 계속 시도한다. 지게차에 올라보고 용접기도 만져본다. 퇴근해선 자격증이며 일학습병행제 학위를 알아보기도 한다. 어느 쪽을 택하건 본질은 노동으로 자기 신세를 바꾸어 보려는 시도다. 이렇듯 영화는 착잡하고 우울한 동시에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생기로 가득하다.

내려오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반성부터 했다. 현장 이야기하는 작가로서 나는 과연 노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노력했는가. 비극의 소재로 노동을 사용하진 않았는가. 물론 한국의 하층 노동 시장은 열악하다. 나쁜 일도 많이 벌어진다. 못된 고용주 또한 한 트럭. 나라 제도 또한 현장에서 일하는 소년과 어린 청년에게 냉혹하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 사실만으로 엮어 현장 실습생 이야기를 썼다고 가정해 보자. 다 읽은 독자들은 크게 두 가지 감정을 느끼리라. ‘아휴, 불쌍한 아이들’, ‘나 혹은 내 자식이 저렇게 위험하고 더러운 일 안 해서 다행이야.’
이런 잠깐의 동정심과 안도감이 과연 현장 실습생의 처지를 바꾸는 힘으로 변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관심이 지속되려면 사람이 죽는 나쁜 일터만 보여줄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소년과 청년들 앞에 놓인 불합리한 장벽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독자들이 상복 입고 애도하길 바라기보단, 다 함께 안전화 신고 벽을 깨부수러 가자고 말할 수 있어야 현장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청장년으로 첫해를 맞이했다. 이젠 우길 여지가 없는 한 사람의 어른이다. 머리는 아직도 어린아이지만 행동으로나마 어른인 척이라도 해보자고 마음 먹어본다. 말을 보태는 작가보단 답을 찾아내는 작가가 되겠노라 다짐해 본다. 일할 준비가 돼 있고 건강한 청년들이 왜 일하지 않는가. 혹은 왜 노동 현장에서 이탈하고 마는가. 이들과 기업을 어떻게 매칭시켜야 하나. 적당한 임금과 노동시간은 어느 정도인가. 향상심을 가지고 발전하게 하는 동기는 또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노동과 자본이 어떻게 어우러져야 산업을 발전시키고 지속할 수 있을까. 올해는 이렇듯 진부한 노동 현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작품을 쓰고 싶다. 이 영화 ‘3학년 2학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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