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국고 700조 ‘코드’에 가두나
‘투명성’ 내건 전방위 감시 우려, 민간은행 배제 ‘지갑 직행’
금융 근간 흔드는 무리한 속도전, 법적 근거·책임 주체 모호

|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정부는 지난 9일 오는 2030년까지 나라살림의 25%를 디지털화폐로 집행하겠다는 파격적인 청사진을 내놨다. 연간 700조원(예산 기준)에 달하는 국고금 중 4분의 1을 '코드'화된 화폐로 흘려보내겠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한 결제 수단의 변경을 넘어 건국 이래 지속되어 온 국가 재정 집행 시스템의 '혈관'을 통째로 바꾸는 작업이다.
관건은 이 거대한 자금이 흐를 디지털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다. 재경부와 금융권에서는 이를 두고 민간은행 계좌를 경유하는 '예금 토큰' 방식과 한국은행이 발급한 지갑에 직접 국고를 꽂아주는 '중앙은행 직접 집행' 방식을 놓고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윤석빈 서강대학교 AI·SW 대학원 특임교수(트러스트 커넥터 대표)는 "2030년 25%라는 목표는 디지털 경제의 표준이 되기 위한 '임계점'으로서 글로벌 금융 경쟁력 확보를 위해 반드시 가야 할 적정한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이흥노 광주과학기술원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 교수 역시 "25% 목표는 우리 경제 인프라가 감당 가능하면서도 확실한 혁신 효과를 낼 수 있는 현실적인 '임계점(Critical Mass)'"이라며 "결코 과도한 속도가 아니며 오히려 매년 100조원에 달하는 국고보조금의 누수를 막고 행정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반면 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25%는 실험으로는 꽤 큰 숫자이고 정책 신호로는 의미가 있지만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넘지 말아야 할 선에 가깝다"며 신중론을 제기했다.
◆ '꼬리표' 달린 국고금...보조금 부정수급 원천 차단
정부가 디지털 화폐에 주목하는 이유는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프로그래밍 가능한 돈)'의 특성 때문이다. 현재의 현금이나 일반 예금은 일단 지급되고 나면 어디에 쓰이는지 실시간으로 추적하기 어렵다. 이른바 '눈먼 돈'이라 불리는 보조금 부정수급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윤 교수는 "이는 단순한 화폐 대체가 아닌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으로의 진화를 의미한다"면서도 "기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과 기술적 신뢰성이 담보되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흥노 교수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구축이나 바우처 사업 등 파급 효과가 큰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한다면, 금융 시장의 충격 없이 재정 승수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근 국제 회의에서 "디지털 기술을 통한 금융 혁신은 금융의 거래 비용을 낮추고, 데이터 축적을 통해 개인화된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며 금융 분야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며 국고 디지털화의 긍정적 기대를 내놓았다.
◆ '은행 경유'냐 '중앙은행 직접 발급'이냐...전달 경로 '엇갈려'
정부의 고민은 '전달 경로'에 있다. 현재 논의되는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민간은행 연계형(예금 토큰 방식)이다. 국민이 기존에 쓰던 은행 계좌를 바탕으로 디지털 화폐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국고보조금 디지털화폐 실험은 투자 의지가 있는 은행하고만 진행할 것"이라며 민간 금융권과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한 바 있다.
법조계에서도 이 방식에 무게를 싣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선영 제이씨엘파트너스 대표변호사는 "민간은행이 발행한 예금토큰을 활용하는 방식은 현행 한국은행법이나 국고금 관리 관련 법령과의 충돌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제도를 신속히 도입하려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기존 법 체계를 크게 흔들지 않으면서도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한국은행 직접 집행형(CBDC 지갑 방식)이다. 한국은행이 개인에게 직접 '디지털 지갑'을 발급하고 정부가 이 지갑으로 직접 국고금을 송금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중간 수수료가 전혀 없고 집행 속도가 실시간에 가깝지만 시중 자금이 은행에서 빠져나가는 '은행 예금 이탈'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금융권의 최대 우려 사항이다.
다만 CBDC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이정훈 한국디지털자산평가인증 이사는 "지난해 4월부터 6월까지 한국은행의 디지털화폐 테스트 사업 '프로젝트 한강'이 이용자 관심은 끌었지만 실제 결제로 이어진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지적했다.
프로젝트 한강은 전자지갑 개설수가 8만1000건으로 모집 상한(10만명)의 81%에 달했지만 전환된 예금토큰 총액 16억4000만원 중 결제에 사용된 금액은 6억9000만원(42.1%)에 그쳤다. 이 수치는 지난해 10월 국회 재정위 안도걸 의원이 한국은행 자료를 바탕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 이사는 "국고금 4분의 1을 디지털화폐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사용하는 소매 결제 수단이어야 한다"며 "인프라가 구성되지 않은 지금 스테이블코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CBDC를 사용하겠다고 한다면, 또다시 CBDC 테스트에 불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 "민간 스타트업 주도 스테이블코인으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
이흥노 교수는 CBDC 일변도의 정책 방향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이미 세계적인 추세는 정부가 직접 모든 것을 통제하는 CBDC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의 창의성과 효율성을 활용하는 스테이블코인 모델로 나아가고 있다"며 "대한민국이 글로벌 디지털 자산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간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국고금 연동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직접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뿐더러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며 "정부는 투명한 가이드라인과 규제라는 '운동장'만 만들고 그 위에서 바우처토큰·상품권토큰·예금토큰 등 국고금을 집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운영은 기술력 있는 민간 스타트업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보조금이 정해진 용도 외에는 결제되지 않도록 스마트 컨트랙트를 설계하거나 복잡한 정산 과정을 자동화하여 행정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혁신은 기성 은행보다 핀테크 스타트업이 훨씬 잘해낼 수 있는 영역"이라며 "정부가 25%의 물량을 민간에게 과감히 개방한다면, 이는 곧 우리 스타트업들에게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거대한 실증 기회(Testbed)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통해 육성된 'K-스테이블코인' 기업들은 테더나 서클 같은 글로벌 공룡들과 당당히 경쟁하며 디지털 금융 수출의 역군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관(官)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민(民)이 마음껏 뛰어노는 이 방식이야말로 디지털 금융 강국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지름길"이라고 밝혔다.
◆ "국가 재정 시스템의 백년대계...법적 근거 정비가 우선"
전문가들은 정책의 성패가 기술력 못지않게 정교한 '법적 설계'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새로운 형태의 돈이 오가는 만큼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명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선영 변호사는 "예금토큰의 법적 성격과 국고금 지급으로서의 효력, 부정수급 발생 시 책임 주체 등에 대해서는 명확한 법적 근거와 세부 규정의 정비가 필요하다"며 "제도 제정 및 확산 단계에서는 관련 법령을 둘러싼 해석 논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 교수 역시 "결국 숫자에 얽매이기보다는 '실패 없는 안전한 인프라 구축'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민관이 협력하여 단계적으로 검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훈 이사는 "국고금 4분의 1을 디지털화폐로 집행하는 장기계획은 환영한다"면서도 "스테이블코인 등 민간과 업계가 참여한다면 더욱 긍정적인 정책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2030년 재정 4분의 1이 디지털로 흐르는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기술적 완성도는 물론 국민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법적 안전장치를 얼마나 빨리 마련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게 지배적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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