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든 '완벽한 연인'에게 전 재산 잃었다"… 로맨스 스캠 피해자의 고백

김태현 기자 2026. 1. 14.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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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속 다정한 위로가 전 재산을 앗아가는 시대. 2~3개월간 매일 연락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때론 전화 통화까지 하며 쌓은 신뢰는 결국 정교하게 짜인 범죄 시나리오였다.
사진=Gemini 생성

[우먼센스] 로맨스 스캠이 진화하고 있다. 단순 온라인 연애빙자 사기를 넘어, 피해자와 장기간 소통하며 정신을 지배한 뒤 투자 권유, 환전 사기로 나아가는 국제 조직형 금융범죄가 되고 있다. 로맨스 스캠 사기범들은 수십년간 쌓인 피해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백 개의 시나리오를 마련해 놓은 채 각종 SNS를 염탐하며 가장 보통의 사람들을 노린다. 지금 소개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사진=Gemini 생성

SNS 속 다정한 위로, 돌아온 건 '개인회생'

"저도 그때 무엇에 홀렸던 것인지 모르겠어요. 사기라는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피해 금액이 1억 3000만 원이 돼 있었어요. 지금은 개인회생 중에 있습니다."

휴대전화 스피커 너머로 울먹이는 말소리가 전해졌다. 로맨스 스캠 피해자 유선정(가명) 씨였다. 30대 기혼 여성인 유 씨는 지난해 6월부터 9월까지 남편 모르게 인스타그램 DM으로 은밀한 정을 쌓았던 '그'에게 속아 전 재산을 고스란히 날렸다.

어떻게 시작된 걸까, 유 씨가 말했다. "작년 여름 그가 인스타그램으로 먼저 호감을 표시해왔어요. 저는 기혼에 아이도 키우고 있어서 처음에는 답장도 안 했어요. 그러다 한 달 뒤에 다시 연락이 와서 결국 대화를 시작했고, 카카오톡 메신저로 넘어가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유 씨는 그와의 연락이 잘못된 선택인 줄 알았으나 다정함과 호탕함에 끊어내지 못했다. 그는 육아로 지친 심신을 파고들었고, 직접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일도 아니었기에 유 씨는 더욱 방심했다. 그는 유 씨에게 자신을 싱가포르에서 외식업체를 운영하는 대표라고 소개했다. 대화 도중 외제차나 골프 라운딩, 파인다이닝에서의 식사와 같이 재력을 과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시작은 300만원…반복된 입금에 1.3억 날려

어느 정도 관계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는 정해진 각본에 따라 유 씨를 공략했다. 한화 3000만 원이 특정 사이트에 묶였는데, 가입해서 대신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요청한 것이다. 유 씨는 "께름칙해서 하루 넘게 거절했는데,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면서 1000만 원은 수수료 명목으로 가져도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아서 부탁을 들어줬어요."

사진=Gemini 생성

그가 언급한 사이트는 현재는 없어진 '웨비나19(webinar-19)'라는 사이트였다. 유 씨가 사이트에 가입 후 고객센터에 연락해 돈을 찾을 수 있느냐고 하자, '3000만 원을 긴급하게 인출하려면 보증금 명목의 300만 원이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유 씨는 빠르게 돈을 찾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의심 없이 300만 원을 송금했고, 그러자 사이트 측에서 '착오 송금으로 블랙리스트가 됐다'고 알렸다.

유 씨는 "이후 출금 관련 팀장이라며 안내된 사람은 제가 보낸 돈이 도박 및 세탁 자금용으로 금융감독원에서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고 압박하며 3000만 원을 다시 입금해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에 3000만 원을 냈고, 한꺼번에 환전 받으려면 다시 5000만 원을 맞춰 입금해야 한다고 해서 또 납부하고. 그러다 보니 1억 3000만 원이 돼 있었어요. 마지막까지도 제가 받을 돈이 1억 6000만 원으로 잘못 설정돼 3000만 원을 더 내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때서야 이게 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2~3개월 유사 연애→투자 권유→잠적 패턴

유 씨의 사례처럼 로맨스 스캠 사기범들은 해외 거주자, 군인, 의사, 글로벌 비즈니스 종사자 등을 사칭해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예전처럼 2~3일 대화하다 금전을 요구하는 식이 아닌 2~3개월간 교류를 통해 마치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후 갑작스러운 사고나 사업 자금, 통관·환전 등을 명분으로 송금을 요구한다. 이러한 금전 요구를 한 번 들어주게 되면 금융감독원 블랙리스트, 악성 송금 신고, 비대면 거래 제한과 같이 그럴듯한 용어를 사용하며 반복 입금을 요구하고, 피해 금액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최근 인공지능(AI)이 발달하면서 로맨스 스캠은 더욱 고도화되는 중이다. 사기범들은 피해자들과 단순히 대화나 통화를 넘어 일상 사진들을 공유하고, 피해자들은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실제 인물로 확신하게 된다. 일부 피해자들은 가족이나 지인들이 로맨스 스캠 사기범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가해자가 아닌 가족·지인들과 연락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이제 만 스무 살을 넘긴 남유천 씨(가명)도 작년 8~10월 로맨스 스캠에 속아 피 같은 돈 7000여만 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공장에 취업해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다. 

남 씨는 "대출까지 2000만 원을 받아 총 9000만 원을 사기당했다. 처음에는 미래를 약속했던 그녀가 나를 속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했던 모든 것들이 설정이고, 그 정도로 디테일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DM 한통으로 시작…AI 활용 사진 조작도

남 씨 역시 시작은 한 통의 인스타그램 DM이었다.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10월에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 게시글을 보고 있는데, 당신의 생활을 보고 궁금해서 이렇게 메시지를 보낸다"며 접근했다.

한눈에 봐도 미인인 그녀의 연락에 남 씨도 호기심이 동해 대화에 응하고 말았다. 한국 여행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점점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녀는 그저 인스타그램 속 대화 상대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매일같이 자신이 일하는 가게 사진이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사진, 요리하는 엄마의 뒷모습 사진까지 남 씨에게 보내면서 마치 홍콩에 있는 연인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처럼 믿게 만들었다. 또 남 씨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전화를 걸어 로맨스 스캠이라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진=Gemini 생성

동시에 그녀는 남 씨에게 "2017년부터 미국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거나 "삼촌이 금 옵션 거래를 한다"는 등 자신이 부자라는 인식도 조금씩 심어갔다. "지금은 육체노동으로는 돈을 벌 수 없는 시대"라며 은연중에 무시하는 메시지로 때로는 남 씨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달여간 치밀하게 사전 준비 작업 끝에 투자 권유가 시작됐다. 그녀는 '현금 1억 원 모으기'가 목표라는 남 씨에게 'Tier1FX'라는 거래소를 통한 가상화폐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남 씨는 "제가 1000만 원 정도 투자해보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저를 말렸어요. 일단 100만 원부터 시작해서 수익이 나면 조금씩 투자 금액을 늘려도 된다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가축을 살찌운 뒤 도축하듯 신뢰를 쌓은 뒤 한꺼번에 가로채는 전형적인 '돼지 도살' 수법이라고 하더라고요."

사진=Gemini 생성

그녀가 권한 사이트는 각종 암호화폐 시세 차트와 한국어를 비롯해 15개 언어를 지원하는 등 사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처음에는 소액을 송금한 뒤 사이트 화면에 수익이 찍히는 것을 보고 안심한 남 씨는 점차 더 큰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출까지 받아 투자를 이어가던 남 씨는 한 지인이 "아무래도 사기인 것 같다"고 말하자 오히려 그녀 대신 지인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사이트에서 로맨스 스캠 사기를 당했다는 블로그 글을 보고나서야 뼈아픈 현실을 깨달았다.

"캄보디아 감금됐다"며 추가로 돈 요구

남 씨는 사기 피해 이후에도 로맨스 스캠 조직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실체 파악에 나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남 씨는 그녀가 캄보디아 범죄 단지와 연관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실제 남 씨가 사기 피해를 당한 시기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중국계 범죄 조직이 한국 남성들을 상대로 로맨스 스캠 등 각종 사기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이들 조직은 SNS에서 여성인 척 활동하며 남성에게 접근해 호감을 산 뒤 주식·코인 투자를 유도해 돈을 받아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스캠에 성공하면 피해 금액의 3∼10%가량을 인센티브로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Gemini 생성

남 씨는 "사기 피해를 당한 이후에도 그녀와 그녀의 조력자들과 돈을 돌려달라고 계속 대화했었어요. 캄보디아에 감금돼 있는 것은 아닌지 떠보기도 했는데, 감금돼 일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탈출하려면 700만 원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또 돈을 요구하더라고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결국 알 수 없었습니다."

유 씨와 남 씨가 전 재산을 잃은 사이트들은 현재 모두 사라졌고, 두 사람은 결국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실제 로맨스 스캠 사기에 당할 경우 피해금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이스피싱과 달리 긴급 계좌지급정지 신청이 불가능하고, 코인으로 송금했다면 추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남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기 피해 이후 법률 상담도 받았는데, 변호사가 '코인으로 송금해 민사 소송은 불가능하고, 형사 소송을 해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었던 상황이었죠."

일각에서는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람의 말을 믿고 어떻게 그런 큰돈을 맡길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유 씨는 "그날의 선택이 너무 후회스럽고, 여전히 남편과 아이에게 부끄럽다. 하지만 수법을 모르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고, 저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다.

남 씨 역시 "제가 피해 사실을 가감 없이 SNS에 공개하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신도 같은 피해를 입었다며 DM을 보낸다. 로맨스 스캠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직접 당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CREDIT INFO

취재 김임수 시사저널 기자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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