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아카이빙과 ‘참전사’로 되살아난 인천상륙작전

경기일보 2026. 1. 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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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거사였다.

바람 앞 등불 신세의 신생국이 기사회생한다.

인천연구원이 '인천상륙작전 참전유공자 아카이브 구축 보고서'를 내놨다고 한다.

이에 앞서 인천에는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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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인천시 AI 영상 캡쳐


인천상륙작전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거사였다. 바람 앞 등불 신세의 신생국이 기사회생한다. K-코리아 번영의 초석이 인천에서 닦여진 셈이다. 인천연구원이 ‘인천상륙작전 참전유공자 아카이브 구축 보고서’를 내놨다고 한다. 이에 앞서 인천에는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도 있었다.

인천연구원 아카이브는 11명 참전용사 육성 증언을 캐냈다. 영상·음성 기록과 사진 자료, 녹취문 등도 담았다. 개인 보관의 사진, 편지, 일기, 군 문서, 지도, 포스터 등도 기증받았다. 특히 올해 95세 허영철옹의 육성 회고는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1950년 19세에 해병 2기로 군에 입대했다. 제주, 부산을 거쳐 미군 수송선에 올라 바로 전장으로 향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이른 새벽 팔미도를 지나면서 고향 인천에 왔구나 했다.

맹렬한 함포사격 끝에 인천 만석동 해안에 상륙했다. 작전계획상의 레드비치(Red Beach)다. 고향 인천은 포연이 자욱했다. 살던 집을 찾았더니 ‘인민공화국 청년단’ 간판이 걸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곧 서울 수복 작전에 투입됐다. 김포비행장을 접수하고 한강을 건넜다. 일주일여 연희고지 전투도 치렀다. 후퇴하던 인민군이 시간을 벌기 위해 10대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던 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비참한 광경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번 인천연구원의 아카이빙은 좀 색다르다. 전쟁 경과나 전투 경험만이 아니다. 전쟁 이전 고향 생활부터 전쟁 이후 삶까지 개인 생애사를 추적한다. 출생과 학창 시절, 가족과 이웃에 대한 기억 등이다. 참전 계기와 소속 부대, 전투 경험도 담았다. 기억에 남는 인물과 사건, 후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있다. 인천시는 이 자료들을 공식 유튜브, 홈페이지 등에서 시민들과 공유한다. 전시나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활용한다.

‘인천학생 6·25 참전사’는 인천의 또 하나 호국 자산이다. 1950년 12월18일 인천숙현국민학교에 집결, 전장으로 향했던 학도병들 기록이다. 3천여명이 20여일을 걸어서 부산의 육군·해병훈련소에 입소했다. 당시 600여명이 한꺼번에 지원한 해병 6기는 지금도 ‘인천 기수’로 불린다.

이경종·규원씨 부자가 사재를 털어 ‘인천학생 6·25 참전사 10권을 펴냈다. 지난 30년간 발로 뛰어 자료를 찾고 개개인의 수기를 모아 편찬했다. 중구 경동 신포시장 건너편에 ‘인천학생 6·25 참전 기념관’도 열어 놓았다.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기, 인천이 발했던 ‘호국 가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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