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추사의 필법 닮은 순백의 기품

옛 선비들에게 나무를 심는 행위는 단순히 주변을 가꾸는 일을 넘어, 자신의 철학과 삶의 궤적을 심는 의례였다. 학자가 심은 나무에 학문적 신념이 깃들 듯, 충남 예산 용궁리 추사고택 뒷동산의 ‘예산 용궁리 백송’에는 추사 김정희의 삶에 얽힌 인문학적 서사가 담겨 있다.
중국 원산의 백송은 번식과 자람이 까다로워 우리 땅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나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백송은 중국을 오가던 선비들이 기념비적으로 심은 게 대부분이다. 이 나무 역시 김정희가 24세의 청년 시절,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다녀오며 가져와 심은 것이다. 추사에게 백송은 각별한 나무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살던 서울 통의동의 월성위궁에서 보냈는데, 바로 그 집 앞에 크고 아름다운 백송이 있었다. 추사가 백송을 가문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계기다. 청년이 되어 연경에서 마주한 백송은 추사에게 고향과 학문을 잇는 매개였다.
귀국길에 어린 백송 한 그루를 가져와 고조부의 묘 앞에 심은 나무가 지금의 예산 용궁리 백송이다. 본래 세 갈래로 뻗었으나, 두 개의 가지가 부러지고 지금은 하나의 가지만 애처로이 남았다. 왕성했던 시절의 위용은 잃었지만, 하얗게 빛나는 줄기의 거친 질감은 추사체의 ‘갈필(渴筆)’을 닮아 여전히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추사가 연경에서 가져온 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당대 선진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그것을 조선의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려 했던 지식인의 열망이었다. 비록 세월의 풍파에 씻겨 앙상한 몸집으로 남았지만, 하얀 줄기 안에 간직된 추사의 열망은 여전히 견고하다. 조선의 선비가 어떤 세계를 바라보았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나무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무를 심은 사람의 시간을 함께 읽는 일이다. 추사가 심은 한 그루의 백송은 잊어가는 옛 선비의 삶과 학문 세계를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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