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가 흔들자, 유럽이 다시 뭉쳤다… 트럼프發 그린란드 위협에 英·나토 재결집
“러시아 북극 활동 엄중 감시”
유럽 내 집단 방위 결속 자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밝힌 그린란드 병합 계획이 유럽 안보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2020년 브렉시트 이후 유럽 주도 안보 논의에서 밀려났던 영국은 이를 유럽 동맹국과 다시 결속력을 높일 기회로 삼았다. 영국과 유럽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틀을 활용해 북극권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구상을 본격화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나토 동맹국들과 북극 지역 내 군사적 존재감을 확대하는 방안을 긴밀히 논의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장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이에 대응하려고 내놓은 조치다. 11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러시아가 하이 노스(High North·고위도 북극권) 지역에서 벌이는 군사 활동 확대에 대해 “극도로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스타머 총리는 미국이 그린란드를 병합하지 않아도 나토 차원에서 안보를 충분히 강화할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려 한다. FT는 익명의 영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지역 내 안보를 보강하려고 나토와 벌이는 논의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며 “북극 억지력과 방위력을 높이려고 나토 동맹국과 협력을 강화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안보 현실은 고립 그 자체였다. 유럽연합(EU)을 탈퇴하면서 공동방위나 군수 협력 체계 페스코(PESCO)에서 같이 이탈했다. 나토 회원국 지위는 유지했지만, 유럽이 주도하는 대다수 안보 논의에서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전환점이 됐다. 덴마크와 EU, 영국을 동시에 자극하며 그린란드 문제를 주권 논쟁이 아닌 집단 방위 프레임으로 바꿨다.

영국은 EU 방위 구조로 복귀하는 대신 나토 북극 방위를 강화하는 우회 경로를 택했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마련했다. 영국은 오는 3월 노르웨이와 핀란드, 스웨덴에서 열리는 나토 콜드 리스폰스 훈련에 해병대 1500명을 파병하기로 했다. 이 훈련은 노르웨이가 나토 동맹국들과 격년으로 개최하는 군사 훈련이다. 영국은 연합 훈련에 참가해 동맹 단결력을 재차 과시하고, 북극권 내 실제 기여도를 입증할 계획이다.
EU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그린란드 문제를 유럽과 나토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로 규정했다. EU는 그린란드 주민이 스스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차기 공동 예산에서 그린란드 지원금은 현재보다 두 배 늘린 약 5억 3000만 유로(약 7550억 원)로 확대할 계획이다. 돈과 규범을 앞세워 미국 독주를 견제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린란드를 아우르는 북극 일대는 단순히 얼음이 덮인 땅이 아니다. 북극 항로와 미사일 조기 경보 체계, 잠수함 작전 구역이 얽힌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이미 북극을 핵심 전장으로 격상시켰다. 2021년 최북단 군사기지에서 자국산 미그 전투기로 북극점을 왕복하며 작전 반경 확대를 과시했고, 같은 해 북방함대를 군관구급으로 격상해 북극 전담 지휘체계를 구축했다. 2024년에는 노르웨이와 맞닿은 바렌츠해에서 핵잠수함 순항미사일 실사격 훈련을 벌였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겹치면서 북극권을 위시한 유럽 안보 위협은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북극을 둘러싼 긴장은 앞으로 더 팽팽해질 전망이다. EU는 예산과 규범을 앞세우고, 영국은 실제 병력을 투입하며 각자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영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유럽 안보 질서 내 핵심 축으로 재진입하려 한다. 미국과 거리를 두기보다 나토를 통해 협력하며 실질적인 전력 보강에 힘을 쏟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가한 압박이 역설적으로 유럽 결속을 강화하고 영국 입지를 넓혀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다만 핵심 군사력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럽과 영국 모두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 소셜미디어에 “미국이 없는 나토를 러시아와 중국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국이 나토에서 전쟁 억지력과 군사력을 보증하는 주체로 남아 있는 구조에서 유럽이 얼마나 정치적·외교적 주도권을 회수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유럽이 자력 방위를 외치면서도 현실적인 전력 공백을 드러낸 이번 상황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북극 안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나토 동맹이 얼마나 실질적인 방어망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피터 맨델슨 전 주미 영국대사는 BBC에 “유럽이 그린란드와 북극을 보호할 레이더와 대미사일 체계, 방공 시스템을 갖출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물으며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결국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맨델슨 전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그린란드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논의와 협상이 불가피한 시대가 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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