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정치행위 탓 ‘낙인’… 교과서 밖 폐허에 방치된 최고의 한국어 연금술사[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6) 서정주 작품 교과서 퇴출
‘부족방언의 요술사’ · ‘시의 政府’ 찬사 불구
전두환 지원연설 등 정치행위 탓 노벨상 제외도
친일작품 11개… 제자 고은의 몰역사성 저격후 논란 확산
2015년 미당의 교과서 수록작품 1개… 2022년 이후엔 0개
후대에 잊어지는건 한국문학 큰 손실 될수도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는 정히 부족방언의 요술사다.”(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인간이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의 시이다.”(이남호 고려대 명예교수)
○○○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이름은 서정주(1915∼2000). 15권의 시집을 통해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긴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우울과 탐미에서 시작한 그의 작품 세계는 해방 후 한국 전통 미학의 고원을 날았고, 인생의 파란만장을 품는 쪽으로 나아갔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 특강을 하러 온 서정주를 본 적이 있다. 당시 칠순에 들어선 그는 이십대 청년들에게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당신이 어린 시절에 친구 집에 갔을 때, 친구 아버지가 “정주야, 무슨 일 있어 왔느냐”라고 할 것을 “서군, 무슨 사(事)로 왕림하셨나”라고 했다는 일화를 유머러스하게 전하며, 언어의 사대주의에 빠지지 말고 우리 말과 글을 갈고 닦으라고 했다. 그 강연을 통해 왜 그가 현대 한국어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시인으로 평가받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그의 아호 미당(未堂)은 친구가 지어준 것으로, ‘덜된 사람’이란 뜻이다. 평생 겸손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론 로댕과 같은 세계적 예술가처럼 부르기 쉬운 이름을 지향한 것이다. 겸허와 자긍의 양면이 다 있는 아호처럼 그의 생애도 빛과 그늘이 함께했다.
◇‘말당’ 서정주라니? =말당(末堂)이라는 멸칭은 그 그늘에서 나왔다. 군사정부 시절의 한 대통령 부인이 ‘未堂’을 ‘末堂’으로 잘못 부른 데서 기인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그와 독재정권의 밀착을 비아냥거리려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일 듯싶다.
실제로 서정주는 1981년 대선 때 전두환 후보 지원 TV연설을 했다. 19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지었다.
그는 이런 정치 행위로 인해 노벨문학상 후보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국제PEN 한국본부 회장을 지낸 문덕수(1928~2020) 시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각국 PEN은 비공개로 노벨상 후보를 추천하는데, 한국 PEN이 1990년대에 서정주를 천거했더니 스웨덴 한림원에서 점검을 위해 서울에 사람을 보냈다. “그 사람이 우리 문학인들로부터 미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전두환 정권을 찬양했다는 대목에서 바로 ‘노(No)’ 했다는 겁니다.”
서정주의 그늘은 그가 2000년 12월 타계한 후 6개월쯤 지나서 더 짙게 드러났다. 시인 고은이 잡지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미당 담론’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그 담론은 미당의 몰역사성을 지적하며 그의 작품이 높게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고은은 미당의 추천을 통해 등단한 제자로, 한때 “서정주는 시의 정부(政府)”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스승을 저격하자 문학계 안팎이 시끄러웠다.
그로 인해 미당이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 작품을 쓴 사실이 크게 부각됐다. 서정주는 시, 수필, 소설 등에 걸쳐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 11개를 쓴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청년이 일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으로 참전한 것을 칭송하는 시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 頌歌)’가 대표적이다.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서정주가 포함됐고, 중·고교 국어·문학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 내용을 살폈던 이원영 동국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의 전언. “미당의 시는 2000년대 초반까지 교과서 수록률이 높았습니다. 2009 개정 교육과정부터 낮아지다가 2015 개정 과정에서는 단 1편 ‘신선 재곤이’만 올랐습니다.”
이 교수 말을 들은 후 2022 개정 교과서들을 찾아봤다. 고교 국어·문학 검인정 교과서 9종이 시 작품을 448개나 수록하고 있는데, 그중 서정주 작품은 1개도 없었다. 윤동주, 정지용 시가 각 18편으로 가장 많았고 김소월(17), 신경림(15), 조지훈·백석(14), 한용운·이육사(12) 순이었다. 생존 시인으론 나희덕(12), 문정희(9), 정희성(8) 작품이 많이 실렸다.
눈에 띄는 것은 정지용, 백석을 포함해 이용악(10), 임화(2) 등 한때 월북 시인으로 분류됐던 이들의 작품도 꽤 올라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언급조차 금기시됐던 이들의 작품은 해금의 빛을 누리는 반면에 한국 대표 시인으로 불렸던 서정주의 시는 친일·독재 찬양의 그늘에 갇혔음을 실감했다.
교과서를 보니, 작년 가을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에 갔다가 느꼈던 씁쓸함이 떠올랐다. 문학관은 서정주의 고향 선운리의 폐교를 개보수해 지난 2001년 개관했다. 건축가 김원이 설계한 6층 건물은 미려했고, 곳곳에서 만나는 미당의 시 작품은 그 빼어남으로 새삼 경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5층에 있는 한 방에서 이마를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서정주의 ‘친일 작품’ 패널 6개가 자리한 방이었다. 이 문학관 개관 때 민족문제연구소가 요구한 대로 친일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서정주의 친일 변명- 종천순일파?’라는 제목의 패널도 보였다. 거기 담긴 글의 일부. “나는 ‘이것은 하늘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그는 앞서 1940년 조선일보 폐간호에 싣기 위해 썼던 ‘행진곡’이 민족주의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 그런 이의 변명이니 그럴듯하지만, 한국의 대시인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겨레 앞에 석고대죄를 한다는 자세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1970년대 말의 자서전 ‘천지유정’에서 그는 친일 행위에 대해 “깊이 사과해 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이후 그의 태도는 사과보다는 변명 쪽에 치우친다. 그와 문학 진영을 달리하는 쪽에서 거세게 공격할수록 서정주는 “종천순일한 것”이라는 태도를 지켰다.
그가 전두환과 가까웠던 것은 군사 정권이 반공(反共)에 철저할 것이라고 믿어서였다고 한다. 6·25전쟁 때 정신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그는 친공(親共) 세력이 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해 암약한다는 정권 측의 말을 신뢰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전두환이 뜻밖에 미당 시를 좋아한다고 수차례 표현한 것도 두 사람이 밀착한 원인의 하나였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친일과 군사정권 찬양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전체가 미래 세대 교과서에서 완벽히 지워지는 것이 온당한지는 의문부호가 있을 수밖에 없다.
◇ “한국어 문학의 손실” =“학생들이 미당의 언어를 접할 기회조차 없다면, 그렇게 해서 후대에 잊히고 만다면, 한국어 문학의 엄청난 손실이 아닐까요.” 이원영 교수의 이런 우려가 현실화할 수 있음을 서울의 한 중학교 국어교사의 말에서 느꼈다. 1999년생인 이 교사는 “중·고교 때 서정주 작품을 배운 적이 없다”라고 했다. 그에게 미당 작품이 교과서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 교과서에 수록될 때는 작가의 생애도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굳이 서정주를 올릴 이유가 없었을 듯 싶다.”
이와 관련, 미당 제자인 국문학자 윤재웅 동국대 총장은 “문화운동을 통해서 좋아질 것으로 본다”라고 했다. 검인정 교과서 편집진이 사회적 분위기를 보기 때문에 서정주 작품을 수록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 바람에서 동국대는 미당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홈페이지에서 미당 시를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역시 미당이 생전 아꼈던 제자인 문정희 시인(전 국립한국문학관장)도 이렇게 말했다. “한 시인이 그가 쓴 시를 통하여 그의 모국어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 말고 더 큰 애국이 있겠는가. 불행한 시대를 건너온 시인의 슬픈 얼룩 때문에 그의 빼어난 시를 교과서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큰 손실이다.”
한때 고은 시인이 이끌었던 민족문학 진영의 문학인들은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미당 담론’ 이후 25년이 지나서인지 그들의 비난 온도가 낮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영을 넘어서 문학계 신망이 높은 정희성 시인(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짧지만 웅숭깊은 답을 줬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 관한 아무런 언급 없이 한국문학사를 기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시·소설 양대산맥… 미당 - 동리 ‘평생 우정’
열여덟살에 만나 문학 동행
전북 고창 태생인 미당 서정주와 경북 경주 출신인 동리(東里) 김시종(1913∼1995). 한국문학사에서 시와 소설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두 사람은 1933년 처음 만난 이후 평생 우정을 나눴다. 미당이 만 18세, 동리가 20세 때였다.
두 사람은 1936년 김달진,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이즈음 동리가 시를 지었다며 미당에게 읽어줬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이란 구절에서 미당이 절창이라며 무릎을 탁 쳤다. 동리가 무르춤한 얼굴로 말했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 일세. ‘꼬집히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이야.” 미당이 웃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소설 쪽으로 가야겠네.”
두 사람은 해방 직후 조지훈, 이한직, 김광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했다. 좌익 계열의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동리와 미당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차례로 맡는 등 문학계 중추 역할을 한다.
동리는 주로 서라벌예대에서, 미당은 동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배출했다. 대학 제자가 아니라도 이들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들은 큰 주목을 받았다.
서정주 제자들은 스승의 집을 자주 찾아 저녁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그 뒷바라지를 미당의 부인 방옥숙 여사는 군말없이 해냈다.
1960년대 가난한 스승의 집을 거의 살다시피 드나들었던 제자가 한때 승려였다 환속한 고은이었다. 그는 나중에 미당의 역사의식을 비판했는데, 동리의 제자 이문구가 문학 진영이 다름에도 끝까지 스승을 옹호하며 그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애쓴 것과 달랐다.
미당은 말년에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세계의 산 1628개의 이름을 매일 암송할 정도로 건강 유지에 힘썼다. 그랬던 그는 2000년 10월 아내가 타계하자 슬픔에 잠겨 곡기를 끊고,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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