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침을 읽다] 1979년 4월 18일 -이영유

주병율 2026. 1. 1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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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렸다 비가 오거나 아니면 때늦은 눈이 올 것 같기도

했다 한 떼의 장정들이 예비군 복장으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교정은 텅 비었고 운동장 가장자리에 붙은 두동의

교사는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 새로

고 3이 된 학생들은 대학입시 준비로 제가끔 침묵 한덩어리씩들을

만들어가고, 교정 밖 여편네들은 궂은 날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옺차림으로 어딘가로 쑤알라 쑤알라대며 사라져버린다

바람은 부는 것 같으면서도 꼭대기의 나무들은 미동도 않고 어젯밤

개나 고양이들이 물어다 놓은 생선 토막들이 지붕 위에서 썩는지

스멀스멀 역한 냄새를 피우기도 했다 도무지 나이를 알아먹기

힘든 사나이들이 낮게 구름이 깔린 하늘 아래를 넘어 철뚝길

넘어 벌판을 넘어 아지랑이처럼 스며들어갔고 부모들이 모두

일 나간 집에 남은 아이들이 노느라고 소란을 떠는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고 또한 가끔씩 창문들이 가만가만 흔들리기도 하였다

잠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마려운 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겨울같았고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달력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냥 그런대로 지낼 수밖에

▶ 이영유는 인천의 시인이다. 그는 인천의 시인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시인이었고 신포동 어느 후미진 술집을 겨울 안개처럼 서성거리며 살았던 시인이었다. 그의 전 삶의 태도가 그러하듯이 이 시 '1979년 4월 18일'은 특별한 사건을 말하지 않는 시다. 흐린 날씨, 비어 있는 교정, 흩어지는 사람들만이 길게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이 무사건의 하루는 오히려 기억되지 못한 시대의 일상을 대표한다. 시는 말해지지 않은 현실의 압력을 풍경처럼 드러낸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익명적이다. 한 떼의 장정들, 고3 학생들, 여편네들, 나이를 알 수 없는 사나이들. 이들은 이름이나 개별 서사를 갖지 못한 채 군상으로 배치된다. 개인은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범주로 존재하며, 얼굴은 풍경 속으로 지워진다.

특히 "침묵 한덩어리씩"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시적 세계의 핵심이다. 학생들의 내면은 말이나 사유가 아니라 침묵이라는 물질로 응고된다. 주체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침묵을 축적하는 존재로 전환된다. 이는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한 조용한 해체다.

이 시에서 인간의 이동은 주체적 행위가 아니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사라지며, 마침내 스며든다. '스며듦'은 흔적 없는 소거의 운동이다. 인간은 세계를 통과하지 않고, 세계 속으로 흡수된다. 세계는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용해시키는 매질이 된다. 이 시에서 제시되고 있는 계절 또한 제자리를 잃고 안개처럼 시대의 언저리를 배회하다 소거된다. 봄도 겨울도 아닌 시간 속에서 현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에서 남는 태도는 "그냥 그런대로 지낼 수밖에"라는 인식이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선택 불가능한 구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다. 이 시에서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말보다 무거운 방식으로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이 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지워짐으로써 시대를 증언한다. 침묵은 이 작품에서 결핍이 아니라, 말보다 무거운 형식이 된다. 2025년, 여전히 그의 침묵이 안개처럼 세밑을 떠돌고 있는 겨울이다.
▲ 주병율 시인

/주병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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