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은 한국사회 ‘흥부놀부 프레임’의 전형적 희생자”

“우리 사회 단점 중 하나가 ‘흥부놀부 프레임’입니다. 늘 흥부는 다 좋고 놀부는 다 나쁘죠. 나는 흥부가 되고 나의 적은 놀부를 만들려 하고요.”
지난해 11월24일 ‘원균 연구회’를 만들고 최근 ‘원균의 진실-역사적 기억의 조작’(논형)이라는 천쪽이 넘는 책을 낸 역사학자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의 말이다.
그가 보기에 임진왜란 때 2대 수군통제사를 지낸 원균은 한국 사회 흥부놀부 프레임의 전형적인 희생양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원균을 ‘임진왜란이 나자 패주를 거듭했음에도 이순신을 모함해 수군통제사를 꿰찼고 이어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해 조선 수군의 궤멸을 부른 졸장’으로 기억한다.
2020년에 자신이 사는 곳이자 원균의 고향인 경기 평택의 시민단체 회원을 상대로 원균 강의를 한 게 계기가 되어 지난 5년 원균 연구에 매달렸다는 저자의 결론은 다르다. “원균은 명장이었고 그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조작된 기록이다.”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저자는 “제도나 권력, 이데올로기, 라이벌 관계, 죽음의 선후 관계에 의해 원균에 대해 많은 왜곡이 일어났다”고 했다.
사실 원균은 종전 뒤 공훈이 가장 큰 장수에게 주는 선무공신 1등을 이순신·권율과 함께 받았다. 그의 부장 2명도 모두 18명뿐인 선무공신에 올랐다. 이순신 부장도 2명이었다.
보물로 지정된 원균 일등공신 책봉 교서는 당대 원균 평가를 잘 보여준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 우수사로 있으면서 20여일 고군분투하며 침략군의 서진을 저지했고 이어 지원에 나선 이순신 수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연전연승을 거뒀는데, 이런 활약을 두고 교서는 “(원균의 수군이) 하루에도 10여개의 진을 쳐부수고 왜선을 130척 격파했고 적의 목을 벤 것도 수백급이었다”고 기술했다.
실록에도 원균이 명장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술이 많다. 이순신 후원자인 유성룡조차 “원균이 제 몸을 잊고 용감히 싸우는 것은 장점입니다”라고 평한 대목이 실록에 있다.
이런데도 원균은 어떻게 ‘음험한 졸장’이 되었을까? 저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실록과 임진왜란의 정전 대접을 받는 난중일기(이순신 저)와 징비록(유성룡)은 물론, 원균과 그의 부장인 이운룡과 강덕룡의 전기 자료, 이순신 구명에 나선 재상 정탁의 글 등을 깊이 살폈다.
저자는 원균에 대한 기억 조작의 대표적인 예로 칠천량 해전(1597·7·15)을 꼽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온라인판)은 정유재란 초기 원균이 지휘한 이 해전을 두고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이며 이 전투 이후 조선 수군이 일거에 무너졌다”고 기술했다.
그는 “칠천량 전투를 두고 기억의 조작이 있다”고 했다. “학자들도 이 전투로 원균이 조선 수군 만명과 판옥선 180척 전부를 다 날렸다고 주장해요.” 저자는 실록에 나오는 도체찰사 이덕형의 보고를 근거로 통설에 반론을 펼쳤다. “칠천량 전투 4년 뒤 현지 피해 조사에 나선 이덕형은 물론 과장이 섞였겠지만 ‘한 명의 전사자도 없다’고 보고합니다. 실제 당시 수군의 이름난 많은 장수 가운데 원균 등 셋 말고는 칠천량 전투로 죽은 사람이 없어요. 판옥선 피해도 크지 않았고요. (원균 전사 뒤) 남은 배 수습을 제대로 못했다면 그 책임은 도원수 권율이나 생존한 수군 장수들에게 있겠지요.”
기억의 조작은 어디에서 시작됐냐고 하자 그는 유성룡 일기 ‘징비록’을 떠올렸다. “유성룡의 거짓말이 후대에 누적되었다고 봐야죠. 원균은 1597년 봄에 통제사가 된 뒤 여름에 죽습니다. 유성룡은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을 압축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었어요. 징비록의 칠천량 해전 설명을 보면 절영도에 갔다가 쫓겨나 배 몇 척을 잃고 다시 부산포로 간 뒤 가덕을 들러 칠천량으로 왔다고 해요. 이는 도저히 하루이틀새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원균 수군의 몇차례 활동을 합쳐 축약하고 과장해 원균을 바보로 만들었죠. 징비록에는 또 원균의 수군이 새벽에 출전해 물이 떨어져 점심 때 가덕도에 갔다고 해요. 말이 안 됩니다. 보통 수군이 전투에 나설 때는 며칠씩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배에 싣거든요. 징비록에는 그런 허점이 수두룩해요.”
그는 ‘기억 조작’의 배경을 정치, 사회, 문화적 요인으로 나눠 설명했다. 먼저 정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유성룡은 ‘주화오국’ 즉 일본과의 강화 협상에 매달려 나라를 망쳤다는 비판에 시달리다 영의정에서 물러나는데요. 징비록을 쓴 것도 주화오국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승의 공을 모두 이순신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자기 사람이란 걸 강조하죠. ‘나를 몰아세운 너희들은 원균을 밀었지만 걔는 사실 다 말아먹었다’는 거죠. 여기에 원균에 관한 이런저런 뜬소문이 결합했을 겁니다.”

사회적 요인은 “조선 후기 국력이 약해지면서 전설적인 영웅을 부각하려는 움직임이 커진 점”이란다. “외세 침략을 걱정할 때마다 애국 명장을 현양하고 우리 모범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커졌어요. 성웅 이순신 신화를 앞서 이끈 대표적 인물이 정조입니다. 정조는 이순신 신도비명을 직접 쓰고 이순신을 기리는 거질의 추모문집까지 발간했어요. 동서고금을 통해 이름난 장수를 기리는 추모문집 발간은 이순신이 유일할 겁니다. 이순신이 특별한 대접을 받을수록 라이벌 원균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죠.”
문화적 요인은 이순신이 당대 무신 중 특히 선비 성향이 강한 점이라고 했다.
그는 이순신 신화의 그늘인 기억 조작의 단적인 예로 원균 부장들의 전기 기록을 꼽았다. “원균의 왼팔인 이운룡은 끝까지 원균에게 충성했어요. 그가 3등 공신으로 책봉된 이유도 원균의 가장 대표적인 부장이어서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도 그의 비문을 보면 처음부터 원균을 멀리한 이순신 부하라고 되어 있어요. 세속의 판단이 기울어진 뒤 후손들이 우리 선조는 이순신 부하였다고 주장한 거죠. 원균의 다른 부장인 강덕룡 비문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순신과 같은 당색인 남인 재상 정탁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구명 용도로 쓴 ‘신구차’에도 원균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많은데 훗날 정탁 후손이 새로 그 글을 문집에 실을 때 원균을 좋게 평가하는 대목이 빠졌다”고도 했다.
그는 책에 “원균 연구는 이순신과 원균의 대립 이면에 존재한 역사의 중층성을 만나게 된다”고 썼다. 어떤 의미일까? “둘 중 누가 잘했어 식 접근을 넘어 역사의 진실을 보자는 것이죠. 이순신은 다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유재란 직전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지리멸렬했어요. 여러 원인이 있죠. 적들이 성을 쌓아 포대를 갖추니 우리 수군의 활동 범위가 확 줄어든 점도 있고 또 작전할 때마다 도원수, 도체찰사, 비변사 쪽에서 각기 보고를 요구해요. 통제사 재량권이 없으니 작전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원균을 전사로 이끈 것도 사실 그런 비효율적인 지휘체계 문제가 컸어요. 원균이 죽은 뒤 조정에서 그 문제를 알고 3대 통제사 이순신에게는 재량권을 줍니다. 현지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요. 이제 우리 사회도 이런 역사의 중층성을 감당할 때가 되었다고 봐요.”
그는 원균 연구 2~3년 전만 해도 ‘이순신 백과사전’을 쓸 생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순신에 관심이 많았어요. 공교롭게 이순신과 제 생일이 같아요.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이순신 책을 많이 읽었죠.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원균이 그렇게 나쁜 장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참에 2019년쯤 평택 시민단체 회원들이 원균이 우리 고향 사람인데 나쁜 사람이냐고 물어요. 그렇지 않다고 하니 강의를 요청하더군요. 그 강의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좋아 이순신 이야기를 정확하게 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원균 해명부터 하자고 생각했죠. 이 연구는 미시사가인 저한테는 아주 좋은 주제입니다. 작은 실마리를 찾아 통설에 도전하는 것이니까요.”
언제쯤 원균의 제자리 찾기가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100년, 아니면 400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통설에는 또 다른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임진왜란 당시 상황의 복잡한 모습을 이제 우리 한국 사회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두 달 전 만든 원균연구회 단톡방에는 200여명이 들어와 있다. 올 한해 원균과 징비록을 각각 주제로 학회지 두권을 낼 계획이다. 학회지 발간 전에는 회원들이 모여 워크숍도 한단다.

인터뷰를 끝내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가 활약한 시대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배울 점이 뭔지 물었다.
“임진왜란은 평화를 지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지 알려줍니다. 선조 시절엔 당시 중요하게 여긴 성리학적 문명의 수준이 매우 높았어요. 목릉성세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목릉은 선조를 가리키죠. 실제 선조 때 퇴계나 율곡을 비롯해 각 집안의 내놓을 만한 인물이 다 나왔어요. 하지만 선조가 부족했던 것은 문을 닫고 살아 나라 바깥의 변화에 어두웠다는 거죠. 포르투갈 세력이 코앞까지 왔는데도 모르고 있었어요. 반면 일본은 꿰고 있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국의 야심을 키워 조선을 침략한 데는 그런 국제정세 영향이 있었어요. 선조는 또 너무 명나라에만 의존했어요. 18~19세기에도 ‘청나라 몰빵 외교’를 했어요. 중국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 관심의 절반만 일본에 대해 가졌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 의존적이죠. 겨우 생각한다는 게 미국을 선택하느냐 중국을 선택하느냐입니다.”
그는 “오늘날 한국 지도자는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이끌 인물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선조 때 성리학적 문명을 떠받들었던 것처럼 지금은 너무 경제에만 갇혀 세상이 실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적은 것 같아요. 케이-컬처, 케이-푸드 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하죠.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우리는 국제질서와 너무 거리를 두고 있어요. ‘미국 사람들 하는 것 보면 알지’라고만 해요. 임진왜란 때 ‘중국 사람들 하는 것 보면 알지’라고 했던 것처럼요. 이젠 우리가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리드해야 합니다. 미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에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미국에 의존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런 말도 했다. “한국 지도자는 (국제 질서를 끌어가는 데 있어) 세계 4강급 국가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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