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백혈병 노동자 산재 역학조사 생략 “유족 고통 덜게 해줘야”
용접·도장 노동 환경과 백혈병 연관성 강조
노조 “고무적이나 최종 승인까지 지켜봐야”
역학조사 기간 1년 훌쩍…숨진 후 판정도
운영규정상 처리기한 180일 ‘유명무실’
산재단체·노동계 “선보장·기간단축 시급”

급성백혈병에 걸려 숨진 삼성중공업 노동자가 산재 유족급여 신청 과정에서 역학조사 생략 판정을 7개월 만에 받았다. 유가족이 산재 절차 진행 과정에서 겪어야 할 긴 고통을 덜어낸 셈이다.
최길연 삼성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중 노동자 50대 ㄱ 씨의 산재 신청 관련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역학조사 생략 판정을 받았다고 11일 밝혔다. 역학조사는 산재 처리 단계에서 통상적으로 가장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년까지 진행된다..
산재신청부터 역학조사 생략까지 '7개월'
최 위원장이 ㄱ 씨의 사망 사건을 접하게 된 건 지난해 4월이었다. 당시 ㄱ 씨 유가족이 산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삼성중 노조를 찾았다.
ㄱ 씨는 20대 초반부터 29년 동안 삼성중에서 용접·도장 노동을 해왔다. 그는 2024년 급성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투병하다 그해 12월 1일 숨졌다. 유가족에 따르면 ㄱ 씨는 숨지기 전 "꼭 산재를 신청하라"고 말했다.
유가족은 산재를 신청하고자 회사에 협조를 구했지만 '개인 질병'이라는 사유로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삼성중 노조도 산재 신청을 검토하고자 사측에 ㄱ 씨의 인사기록 자료를 요청했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밝혔다.
삼성중 노조는 ㄱ 씨가 평소 조선소 내에서 벤젠·용접흄(용접 때 열에 의해 증발된 물질이 냉각돼 발생하는 미세 소립자) 등 발암 물질에 노출돼 있었다고 판단해 산재 신청에 나섰다.

삼성중 노조는 근로복지공단에 역학조사 생략을 촉구했다. 거제노동안전보건활동가모임과 함께 공문을 발송하고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근로복지공단 업무상 질병 처리 절차를 보면, 전문적인 조사가 필요한 업무상 질병일 경우 업무상질병자문위원회 전문조사 필요성 심의를 거친다. 이후 전문조사가 필요하지 않다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업무상 재해 여부를 결정하고, 전문조사가 필요하다면 역학조사를 거쳐 판정한다.
삼성중 노조는 조선소 용접·도장 노동자의 직업성 암 산재 승인 사례를 근거로 역학조사 생략을 주장해왔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도 9개월 만에 역학조사 생략을 결정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질병과 노동자 간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사례가 충분히 쌓였다면 역학조사를 생략할 수 있다"며 "조선소 용접·도장 노동자의 백혈병 관련 산재 승인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중 노조는 통상적으로 1년가량 걸리는 역학조사 생략에 반색했다. 다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며 최종 산재 승인으로 연결하겠다는 각오다.
최 위원장은 "삼성중에서 처음으로 공론화되는 직업성 암 관련 산재 신청이 불승인·행정소송으로 번지지 않길 바랄뿐"이라며 "조속한 산재 승인으로 ㄱ 씨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길어도 너무 긴 역학조사…숨진 후 판정받기도
전국 산재 노동자는 여전히 역학조사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백혈병 등 직업성 암 관련 산재 처리는 장시간 소요된다. 직업성 암은 업무상 사고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에 조사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최근 역학조사 기관이 재해자의 작업 환경과 담당 업무 등의 연관성을 판단하는 데 평균 1년 이상 소요되고 있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박해철(더불어민주당·경기 안산 병)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역학조사 수행기관의 평균 역학조사 기간은 588.8일, 699.8일로 나타났다.
산재 처리 과정에서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은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과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등이다. 직업환경연구원은 일반적 역학조사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희귀병 등의 고난도 역학조사를 맡는다. 2020년 275.2일이었던 직업환경연구원의 건당 역학조사 기간은 2024년에 588.8일로 증가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같은 기간 441.4일에서 699.8일까지 늘었다.
2018년부터 2025년 8월까지 산재신청 노동자 141명이 역학조사 도중 숨졌고, 이 중 66%가 사망 뒤 산재를 인정받았다.

정치권에서도 이 같은 목소리에 호응해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2023년 9월 21대 국회 우원식(더불어민주당·서울 노원 을) 의원 등 14인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업무상 재해 조사기간을 사고 7일·질병 90일 △역학조사 기간을 180일 △처리 지연 시 산재 보험급여 선지급 등의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 법안은 2024년 5월 2024년 5월 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 들어서도 조사 기간 단축, 산재 보험급여 선지급 내용을 담은 산재보험법 개정안들이 발의됐지만 계류 중이다.

산재 관련 단체·노동계는 재해자·유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산재 처리 장기화 등의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권동희 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인노무사는 "산재 처리 기간 장기화는 재해자·가족으로 하여금 금전적 피해를 가해 가정생활 파탄 등의 문제로 이어진다"며 "매해 활용률이 4% 수준인 '추정의 원칙(산재 처리 과정에서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간주하는 원칙)'의 대상을 확대하고 실질적 산재 처리 기간 감소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란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상임활동가는 "역학조사 기관은 운영규정상 처리기한으로 180일을 정해뒀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노동자가 산재 여부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고용 관계상 불이익을 우려해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이에 "업무상 재해 조사·역학조사 기간을 법정화하고, 만약 지연될 경우 국가가 산재보험을 우선 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주노총·금속노조 등 노동계도 지난해 9월 정부 역학조사 기간 단축 계획을 두고 △사업주의 고의적 산재 처리 지연 △산재보험 선보장 제도 도입 등을 강조했다.
김병훈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노동안전국장은 "산재 노동자가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생계 곤란에 빠지는 부작용을 막는 게 우선"이라며 "산재 처리 기간 단축도 중요하나, 노동자가 체감할 수 있는 대책은 적기에 빨리 치료받고 건강히 일터에 복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지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