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 대구 영시 화재 의연비…향후 국채보상운동에 확신 심어준 대구정신 담겨

최미화 기자 2026. 1. 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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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30일자로 대구시문화유산자료가 된 「대구 영시 화재 의연비」는 대구선각자들에게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민초들의 기부동참 내역을 알 수 있다. 최미화 기자

127년전 대한제국 당시인 1899년(광무3) 12월2일 새벽 추위속에 대구 영시(현 약령시의 애칭)에 큰 불이 났다. 이 불은 홍살문, 순검교번소(요즘 경찰 지구대)를 비롯한 관아 부속건물과 주단속방(紬緞屬房, 비단 파는 상점) 등 19곳의 상업 시설, 민가 5호 등에 피해를 냈다. 이 대형화재를 극복하기 위해 경상감영과 대구군이 앞장서고, 대구민초들이 적극 참여하여 그달 중하순경부터 의연금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모두 5천487냥의 의연금이 모였다. 이듬해인 1900년 4~5월경에 이재민 구휼 및 사용 내역 정산이 이뤄졌고, 이해 6월에 대구 영시 화재의연비가 제작 건립됐다.

모금 내역은 대구의 고위관료 5명이 1천900냥, 대구의 유지나 부호 1천250냥, 대구의 기관단체 781냥, 40냥 이하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다수의 민초들이 1천556냥을 냈다. 물론 경상북도 관찰사 김직현이 1천냥, 대구군수 김영호가 700냥, 대구진위대 참령이 200냥, 감찰 이선순 200냥을 냈다.

향후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적성군수 김윤수(국채보상운동 발기인, 대구단연상채회 재무) 200냥, 주사 서상돈(국채보상운동 최초 발의 발기인, 대구단연상채회 재무) 200냥, 초재방(국산 한약재를 취급하는 한약업 단체) 중 200냥, 인삼방 중 105냥, 모물방(짐승의 모피 혹은 모피 제품을 판매하는 상인단체) 중 104냥, 인동군수 서덕초 100냥, 지사 최극창 100냥, 한성은행 대구출장소 100냥, 당재방(수입약재를 취급하는 한약재 단체) 중 100냥 등을 냈다.
경북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김문기 명예교수가 이 비석에 쓰인 글자를 최초로 발견한 김용익 전 계성고 역사교사로 부터 얘기를 듣고 판독한 「대구 영시 화재 의연비」 모금 내역과 집행 내역. 최미화 기자

대구 영시 화재의연금은 지역리더는 물론 서민들까지 한마음으로 나눔에 적극 동참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아너스클럽이나 기부자 명패에는 끼이지 못하지만, 한겨울에 불어닥친 대형화재를 극복하는데 마음을 보태는 대구시민들의 '빈자일등'(貧者一燈) 정신은 대구의 대표적인 정체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정신적 토양이 대구에서 큰 인물이나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는 풍토와 직결된다.

대구 영사 화재의연금은 집행과정도 투명하게 기록되었는데 화재로 불탄 화물 가격 구휼에 4천539냥7전5푼, 화재로 불탄 민가 구휼에 900냥, 백지물 및 잡비로 47냥2전5푼을 썼다. 화재의연금을 집행하는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화재피해를 복구하는데 대부분의 돈을 썼다.

이 대구 영시 화재의연비는 갑오개혁 이후 대구가 유통·상업 중심지로 발전해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역사 자료일 뿐만 아니라 대구에서 발견된 최초의 의연공덕비이다. 이 대구 영시 화재의연비는 대구의 조선 시대 달성서씨의 달성공원 나라 무상 기부,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등 대구의 뚜렷한 정체성 가운데 하나인 나눔 정신의 계보를 잇는 현장이기도 하다.

'대구 영시 화재 의연비'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근거를 제공한 이문기 경북대 명예교수는 "동기인 김용익(전 계성고 교사)씨로부터 옛 인보당 한약방(과거 모던다방, 삼미산더미소고기국밥, 현재 빈 점포) 앞에 세워둔 돌에 글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비석을 판독하게 됐다"고 경위를 밝혔다.

이 교수는 "영시 화재 극복에 적어도 1~2백명의 대구시민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대구의 선각적 지식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많이 참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반이상 잘려나간 대구 영시 화재의연비는 높이 95㎝, 폭 41㎝, 두께 12.5㎝ 크기의 흑운모 화강암 재질이다. 원래 전 소유주(대구시 중구 성내동)가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가는 디딤돌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고 박순동 회장(구 인보당한약방)이 설득하여 양도를 받아 2003년부터 남성로의 인보당한약방(현재 빈 점포, 전 모던다방 이후 모 국밥집) 앞에 세워두었다. 계성고 역사과 김용익 교사가 이 돌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고 경북대 이문기 교수에게 연락하여 2022년에 자비판독하여 「대구 영시 화재의연비」의 성격을 파악했다.

이후 2023년 11월 박순동 회장의 아들 박재석은 대구정체성을 담은 이 비석이 지역사회에서 널리 쓰이기를 기원하며 대구근대역사관에 기증했다.

대구 영시 화재의연비는 1900년 무렵 대구지역에서 민관 합심으로 이웃을 불행을 구조해준 상호부조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화재의연비에 1~200명의 민초들이 참여한 것이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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