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청해봉’ 지명, 대구 공무원이 지었다

강승규 2026. 1. 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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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좌표로만 표기되던 남극의 한 봉우리가 대구 한 공무원에 의해 마침내 이름을 얻었다.

그는 "고유한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 땅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남기는 지명이 바로 좋은 지명"이라며 "청해봉이 그 이정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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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유가읍 행정복지센터 여옥 주무관
국토지리정보원 고유지명 공모전서 대상 수상
장보고과학기지서 착안…국제지명 통용 가능성
청해봉의 영문 지명과 종류, 위도. <국토교통부 제공>

그동안 숫자 좌표로만 불리던 남극의 한 봉우리에 우리말 이름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그 새 명칭은 '청해봉(靑海峰)'이다. 이 이름을 붙인 이는 극지 연구자가 아니다. 대구 달성군 유가읍행정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여옥(45·6급) 주무관이다.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이 주관한 '남극 고유지명 공모전(2025년 10월 20~31일)'에서 그가 제안한 명칭이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장보고 과학기지 인근 지형에 우리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열린 이번 공모엔 1천163건이 접수됐다. 그중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이름이 '청해봉'이었다.

남극 장보고 기지·K-루트 인근 우리말 지명 제정 위치(16종). <국토교통부 제공>

◆ 이름 부르는 순간, 좌표는 장소가 됐다

이 공모전을 앞두고 여 주무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었다. "이 시에는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지만, 불리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는 내용의 구절이 있습니다. 남극의 봉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남극은 '지도 속 좌표'이거나 '과학 연구 대상'에 그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름이 붙는 순간 그곳은 누군가의 언어와 기억이 닿는 장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단순 지형 정보가 아니라 스토리를 가진 공간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지명이 가진 힘에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지명은 그 땅의 첫 인상입니다. 그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정신이 담긴 그릇이기도 합니다. 머나먼 극지의 땅에도 우리말 이름이 붙는다면 남극이 조금 더 가까운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청해봉' 명칭 아이디어는 남극에 있는 장보고 과학기지에서 착안했다. 기지 이름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1천200년 전 장보고 대사가 세운 청해진이 겹쳐졌다고 했다.

여옥 대구 달성군 유가읍행정복지센터 주무관이 남극 고유지명 공모전 대상작 청해봉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당시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니라,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던 장보고의 도전은 오늘날 극지 연구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는 다르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정신은 이어진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남극의 봉우리를 우리 역사와 연결하는 이름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청해는 '맑고 깨끗한 바다'를 뜻한다. 그는 이 이름에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싶어 했다. 남극조약이 강조하는 평화적 이용과 환경 보호, 그리고 극한의 환경 속에서 연구를 이어가는 탐사대원들의 정신까지 함께 담아 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한다.

특히 그 봉우리가 장보고 과학기지를 내려다보는 지형이라는 점도 이름을 정하는 데 영향을 줬다.

"지도와 사진을 들여다 보며 '이 산이 기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를 쉼없이 떠올렸습니다. 마치 요새처럼 기지를 지켜보는 존재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호의 의미도 담고 싶었어요."

'공공의 언어'로 남기를

공모전 대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기쁨보다 당혹감이 먼저였다고 했다. 수많은 제안 가운데 자신의 명칭이 선택됐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남극의 공식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와서다.

"개인의 생각이 국가의 기록으로 남는다는 게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수상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올해 1월부터 유가읍행정복지센터에서 청소 업무를 맡고 있어서다.

"청해봉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살아가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습니다."

행정 현장에서의 경험도 이름을 짓는 데 영향을 줬다. 지명은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부르고 공감할 수 있는 '공공의 언어'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행정 일을 하면서 늘 주민들과 소통합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름에도 반영된 것 같습니다."

남극 장보고기지 인근 지형. 우리말 이름 청해봉이 부여 예정인 봉우리가 이 일대에 위치한다. <구글어스 캡처>

그는 이번 일이 개인적인 영광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작은 지방 공무원의 발상도 국가적 가치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서다.

극지연구소 관측 자료와 국립해양조사원 및 구글 어스를 통해 거리를 추정한 결과, 대구 중심부(중구 동인동)에서 남극 봉우리(장보고 과학기지 인근)까지 직선거리는 1만2천500㎞~1만3천㎞로 추산된다. 지구 전체 둘레(4만㎞)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다.

남극은 특정 국가의 영토가 아니라 인류의 공동 자산이다. 그는 청해봉이 국경을 넘어 연구자들이 협력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거 청해진이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거점이었던 것처럼, 청해봉도 세계 연구자들이 함께 만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지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 문장을 떠올렸다. '도서관, 어제를 담고 오늘을 보고 내일을 짓다.' 2019년 달성군도서관이 도서관주간을 운영할 때 내건 공식 표어였다. 그는 좋은 지명도 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청해봉 역시 그런 이름이 되기를 바랐다. 훗날 누군가 세계 지도를 펼쳤을 때 남극 한가운데서 우리말 지명을 발견하고 작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결국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이번에 정말 실감했습니다."

머나먼 남극에서 '청해봉'이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대한민국의 극지 연구와 도전의 역사도 함께 기억되기를 그는 기대하고 있다.

◆ 남극 '청해봉', 실제로 공식 지명 됐나…국토지리정보원 "등재 절차 진행"

'청해봉'이 실제 남극 지도에 공식 반영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확인 결과 국내 심의는 이미 마무리됐고, 현재 국제 남극지명 데이터베이스(CGA) 등재 절차가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빠르면 올 상반기, 늦어도 하반기쯤 등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호재 국토지리정보원장 직무대행은 "등재가 완료되면 국내외 연구자들이 동일 명칭을 사용하게 되고, 지도 제작과 학술 논문 등에서도 공식 표기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청해봉'의 의미는 장보고 과학기지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크다. 장보고 과학기지는 2014년 문을 연 한국의 두 번째 남극 상주기지다. 당시 한국은 남극에 두 곳 이상의 연중 기지를 둔 10번째 국가가 됐다. 장보고기지 인근 지형에 한국어 이름을 올리는 일은 한 개인의 작명 성과를 넘어 한국 극지 연구의 시간을 공간의 언어로 남기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남극 지명은 일반 국내 지명과 다르다. 남극은 특정 국가의 영토가 아닌 국제사회가 공동 관리하는 공간이다. 이 때문에 각국이 제안한 지명은 국제적으로 공유·관리된다. 최종적으로 국제과학위원회(SCAR) 산하 CGA에 등재돼야 학술 지도와 연구 문헌 등에서 통용되는 공식 명칭이 된다.

국제과학위원회에 따르면 2026년 1월 기준 CGA에 올라 있는 남극 지명은 3만9천164건이다. 이 가운데 한국이 제안한 지명은 27건으로 파악됐다. 미국(1만3천192건), 영국(5천181건), 러시아(4천808건), 뉴질랜드(3천577건), 호주(2천564건) 등에 비하면 아직 적은 편이다. 그런 점에서 '청해봉' 추진은 한국의 극지 활동과 연구 성과를 국제 지명 체계 속에 새기는 작업으로도 읽힌다.

남극 장보고기지 인근 공모 지명 중 희망곶, 청석호, 백운마당의 위치와 현장 모습. <국토교통부 제공>

등재 과정에서는 해당 지형에 기존 타국 제안 명칭이 있는지, 좌표는 정확한지, 이름이 중복될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공모전 수상만으로 곧바로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해외에서도 남극 지명은 단순한 표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뉴질랜드 지명위원회는 공식 회의록에서 "뉴질랜드는 남극에서 강한 목소리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지명 부여는 그 목소리를 내는 한 방식"이라고 밝힌 바 있다. 뉴질랜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는 별도 지명기구와 기준을 두고 남극 지명을 관리해 왔다. 남극 지명이 과학 연구의 편의를 위한 표기인 동시에, 각국이 자국의 탐사 역사와 존재감을 기록하는 방식으로도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