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값 다주고 사는건 바보나 하는 일”…할인과 중고로 돌아가는 미국 소비 [홍키자의 美쿡]
미국의 대형 약국 체인 CVS에서 껌 한 통을 사면 영수증이 팔 길이만큼 쏟아져 나옵니다. 인터넷에서는 “CVS 영수증으로 스카프를 만들었다”, “화장지 대용으로 쓴다”는 농담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터무니없이 긴 영수증의 정체는 바로 쿠폰입니다. 3달러짜리 물건을 사면 30장이 넘는 할인 쿠폰이 따라옵니다. 다음에 올 때 쓰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정가는 “아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가격”일 뿐입니다. 한국에서 세일이 특별한 기회라면, 미국에서 할인은 당연한 권리이자 일상입니다. 그리고 이제 CVS의 긴 종이 영수증은 스마트폰 속 ‘맞춤형 알림’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비효율적으로 보이던 쿠폰 시스템은 AI를 만나 완벽한 소비 엔진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할인 문화가 자연스럽게 중고 시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새 제품도 할인받아 사는데, 굳이 정가를 낼 필요가 있나?”라는 사고방식이 “그렇다면 중고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덕분에 2025년 3분기 소비 지출은 16조 5890억 달러(약 2경 3888조 원)로 전 분기 16조 4457억 달러(약 2경 3682조 원)에서 증가했습니다. 할인과 중고, 이 두 가지가 GDP의 69.1%를 차지하는 미국 소비 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축입니다.
실제로 2025년 3분기 미국 GDP는 연율 기준 4.3% 성장하며 강력한 경제 회복세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AI가 이 모든 비효율을 제거했습니다. 2024년 기준 미국 소비자의 90%가 쿠폰을 사용한 경험이 있으며, 온라인 쇼핑객의 62%는 구매 전 프로모 코드를 적극적으로 검색합니다.
디지털 쿠폰 사용자만 1억 6550만 명으로, 미국 성인 인구의 62%에 달합니다. 온라인 쇼핑객 22%는 “거의 매번” 디지털 쿠폰을 사용한다고 답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개인화입니다. AI는 당신이 무엇을 사고, 언제 사고, 얼마에 사는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CVS의 1미터짜리 종이 영수증에 담긴 30장의 쿠폰 중 당신에게 맞는 것은 2-3장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AI는 당신이 실제로 살 확률이 높은 상품의 쿠폰만 보여줍니다. 당신이 매달 기저귀를 산다면 기저귀 할인을, 반려동물 사료를 산다면 사료 할인을 정확히 그 타이밍에 제공합니다.

실제로 2023년 연 소득 15만 달러(약 2억 1600만 원) 이상 소비자의 65%가 디지털 할인 쿠폰을 사용했습니다. 오히려 “정가를 그대로 지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소비”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단순히 약간의 할인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격 인하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할인의 영향력은 구매 결정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디지털 쿠폰을 사용하는 쇼핑객의 장바구니 금액은 쿠폰을 사용하지 않는 쇼핑객보다 68% 더 큽니다. “원래 100달러인데 50달러에 샀으니 50달러를 번 셈”이라는 논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의 67%는 할인을 제공받은 후 계획에 없던 구매를 했고, 80%는 할인을 제공받는다면 처음 접하는 브랜드도 기꺼이 구매하겠다고 답했습니다.
2024년 미국 중고 의류 시장은 약 530억 달러(약 76조3200억 원) 규모로, 전년 대비 14% 성장했습니다. 이는 2021년 이후 가장 강력한 성장세이며, 전체 의류 소매 시장보다 5배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9년까지 740억 달러(약 106조56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연평균 9%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입니다.
온라인 리세일 시장은 더욱 가파릅니다. 2024년 온라인 중고 거래는 23% 성장하며 2021년 이후 최고 성장률을 기록했고, 2029년까지 거의 두 배 증가해 400억 달러(약 57조 6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2024년 미국 소비자의 58%가 중고 의류를 구매했으며, 의류 구매의 40%가 중고 제품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의류 예산의 34%를 중고 제품에 지출할 계획이라고 답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Z세대와 밀레니얼)는 의류 예산의 거의 절반(46%)을 중고에 지출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자동차는 더욱 극적입니다. 2023년 기준 미국에서 판매된 자동차의 약 75%가 중고차였습니다. 4대 중 3대가 중고차인 셈입니다. 미국 중고차 시장은 연간 약 3600만~4000만 대가 거래되는데 이는 신차 시장(약 1500만 대)의 2.53배 규모입니다.
할인 문화가 중고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미국 소비자들은 이미 “정가는 의미 없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새 제품의 정가가 100달러인데 쿠폰으로 60달러에 살 수 있고, 같은 제품을 중고로 40달러에 살 수 있다면, 중고는 단순히 할인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습니다.
실제로 ThredUp의 2025년 리세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의 60%는 “중고 의류 쇼핑이 가장 가성비 좋은 선택”이라고 답했습니다. 절약이 중고 쇼핑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환경에 대한 우려는 네 번째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중고 구매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국 소비자들은 물건을 구매할 때부터 “나중에 얼마에 되팔 수 있을지”를 고려합니다. 202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의 47%는 의류를 구매하기 전에 재판매 가치를 고려한다고 답했습니다. 물건은 “잠시 사용하다가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이동 자산”으로 인식됩니다. 실제로 미국 가정의 평균 거주 기간은 약 13년으로, 한국(약 18년)보다 짧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가구를 모두 옮기는 것보다 현지에서 팔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중고로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판단합니다.
미국인들에게 소비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행위가 아닙니다. ‘시장을 이겼다(Beat the Market)’는 승리감을 얻는 게임입니다. 쿠폰으로 40%를 깎고, 2년 뒤 중고로 50%를 회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공짜로 썼다’고 믿습니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할인 문화가 “정가는 의미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새것과 중고의 경계도 의미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품이 새 것인지 중고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얼마에 되팔 수 있는지입니다.
수치가 이를 입증합니다. 2025년 3분기 미국 경제는 연율 4.3% 성장하며 강력한 회복세를 보였고, 이는 전적으로 소비 지출 덕분이었습니다. 2025년 1분기 소비 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5.5% 증가했습니다. CVS의 1미터짜리 종이 영수증은 이제 사라졌지만, AI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할인 문화는 오히려 더 강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빚내서 흥청망청 쓰는 게 아니라, 할인과 중고라는 두 가지 안전장치를 통해 현명하게 소비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문화는 미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중고 시장이 활성화돼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더욱 부담 없이 새로운 제품을 구매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신제품 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집니다. 물건이 버려지지 않고 계속 순환하기 때문에 환경적으로도 지속 가능합니다.
GDP의 69.1%를 소비가 차지하는 미국 경제에서, 할인과 중고는 단순한 소비 트렌드가 아닙니다.
미국 소비 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축이며, 끊임없이 돌아가는 소비 엔진의 핵심 메커니즘입니다. 정가는 바보들이나 내는 돈이라는 믿음, 그리고 모든 물건은 언젠가 되팔 수 있다는 확신이 미국 소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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