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교사·목사·엄마가 이야기 보따리 푼다, '스탠드업 코미디' [최주연의 스포 주의]

최주연 2026. 1. 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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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성수 스탠드업 코미디씬 파고든 ‘투잡러들’
“망하는 것도 매력”…열린 무대, 열린 소재
“자극적이라는 편견 넘어야 한 단계 더 발전”
편집자주
이야기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스포)’라 합니다. 어쩌면 스포가 될지도 모를 결정적 이미지를 말머리 삼아 먼저 보여드릴까 합니다. 무슨 사연일지 추측하면서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한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없었던 세상의 비하인드가 펼쳐집니다.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루프탑 술집에서 성수코미디클럽의 '서울 월세에 투잡 뛰는 코미디언 이야기'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다. 최주연 기자
같은 날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펍에서 교사 스탠드업 코미디언 허니디(왼쪽부터), 엄마 코미디언 이유진, 목사 코미디언 준태씨가 본보 취재에 응하고 있다. 스누트라는 조명 장비를 활용해 핀 조명을 연출, 촬영했다. 최주연 기자

"우리 반 애들한테 이상한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수학여행 때 아무도 안 따라오더라고요."

크리스마스 연휴, 서울 성수동의 한 펍. 무대에 선 '교사' 스탠드업 코미디언 허니디(37)씨의 말에 관객들이 박장대소한다. 마이크를 쥔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아이들을 가르친 20년 차 베테랑 초등교사다.

이날 공연의 주제는 '투잡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다. 다음 순서인 '목사' 코미디언 준태(34)씨는 성탄절 소재의 ‘19금’ 농담으로 기독교가 강조하는 ‘순결’의 개념을 비틀었다. 그의 본업은 목사다. 아이를 재우느라 가장 늦게 도착한 이유진씨는 양수가 일찍 터졌던 출산 경험을 위트 있게 풀어냈다. 공연 초반 경계하던 관객들은 결국 웃음보를 터트리며 무장 해제됐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관객 앞에 서서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내는 무대 형식이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문화로, 한국에서는 2017년 홍대 인근에 전용 코미디 클럽이 생기면서 처음 시작됐다.

25일 서울 마포구 홍대 거리의 한 지하 공연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 김민섭(맨 오른쪽)씨가 본인이 기획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에서 농담을 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26일 성수코미디클럽 운영자인 김기운씨가 공연 시작 전 관객들에게 공지사항 및 당부사항을 알리고 있다. 가장 먼저 공연에 나와 스탠드업에 대한 기본 정보를 알리고 분위기를 돋우는 '바람잡이' 역할이다. 최주연 기자
같은 날 공연을 보며 부부 관객이 웃고 있다. 최주연 기자

“망하는 곳도 매력”…열린 무대, 제한 없는 소재

스탠드업 코미디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성’이다. 주어진 시간 5~10분 동안 누구든 무대에 서서 정치·종교·성적인 내용까지, 검열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에세이 작가인 정성은씨는 주로 '페미니즘'을 소재로 농담을 한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끼리 얘기하기 예민한 지점들을 과감히 소재로 삼을 때 쾌감을 느낀다"며 "사람들이 스탠드업을 보고 한바탕 웃고 난 뒤 편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픈마이크’ 신청만 하면 된다는 점 또한 사전에 코너 통과를 받아야 하는 기존 방송 코미디와 다르다. 성수코미디클럽에서 매주 수요일 오픈마이크를 운영하는 김기운(26)씨는 “누가 올라올지 모른다는 점이 리스크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스탠드업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무대 망치는 거, 스탠드업 하는 사람들은 다 겪어 봤거든요. 무대에 서는 경험 자체가 성장이에요.”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펍에서 '엄마' 스탠드업 코미디언 이유진씨가 본보 취재에 응하고 있다. 이유진씨가 젖병을 아이에게 물리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최주연 기자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펍에서 교사 스탠드업 코미디언 '허니디'가 본보 취재에 응하고 있다. 허니디씨가 출근복 차림을 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최주연 기자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펍에서 목사 스탠드업 코미디언 '준태'가 본보 취재에 응하고 있다. 준태씨가 로만컬러 사제복을 입고 있다(오른쪽 사진). 최주연 기자

일반인들이 주도하는 '스탠드업 생태계'의 확장

최근 들어 '비 공채', '비 방송인'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여럿 등장하고 있다. 삼삼오오 진행된 농담 워크숍으로 출발한 ‘서촌 코미디클럽’을 비롯해 성수코미디클럽, 저스트 코미디 등 일반인 중심의 크루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지난해 연말 공연을 모두 매진시킨 신인 '원소윤' 또한 한 플랫폼 농담 모임 출신이다.

투잡러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은 전업 코미디언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목사 준태씨는 “설교 쓰는 것보다 농담 쓰는 것이 훨씬 더 걸린다”며 “평소 목회하면서 느낀 답답함을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평소엔 육아를 하다 남편이 아이를 봐주는 틈을 타 공연을 하는 이유진씨는 "무대에 오르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임신 마지막 달까지 공연을 했다"고 말했다.

관객 반응도 나쁘지 않다. 지난달 26일 성수코미디클럽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자리했다. 당일 처음 스탠드업 코미디를 관람하며 '크라우드 워킹(관객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을 경험한 구자경(52)씨는 “코미디언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줘 참 재밌었다. 무조건 또 올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같은 날 관계자가 시간이 다 됐다는 뜻으로 휴대폰 조명을 흔들고 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면 관계자가 코미디언에게 불빛을 흔들어 신호를 준다. 최주연 기자
같은 날 메타코미디 작가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장현우씨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농담노트'를 보고 있다. 최주연 기자

“자극적이라는 편견 넘어야”

스탠드업 코미디를 둘러싼 ‘자극적이고 불편하다’는 인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달 25, 26일 홍대와 성수에서 각각 만난 관객 김하솜(22)씨와 김서윤(22)씨는 공통적으로 “자극적일까 봐 보기 전 걱정했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특정 대상을 놀리며 웃음을 유발하는 ‘로스팅’은 스탠드업의 주요 기법 중 하나다. 모든 분야의 농담이 허용되는 스탠드업 코미디이지만,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따라 적정한 선을 가늠하는 감각이 중요하다.

오픈마이크 운영자 김씨는 “관객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보니 욕설이나 성적인 농담으로 쉽게 웃음을 얻으려는 경우도 있다”며 “일상적 경험을 공감의 언어로 풀어내는 무대가 늘어날수록, 스탠드업 코미디의 저변도 자연스럽게 넓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주연 기자 juic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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