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에도 이어질 꾸역꾸역 포복하는 삶 [김영민의 연재할 결심]

나는 20세기에 쓰인 한국사의 서사들이 대개 승리 서사가 아니었나 의심한다. 영토 확장에 성공했던 고구려에 대한 동경, 황제국의 전례를 거행했던 고려에 대한 찬탄, 근대의 맹아가 자라났다는 조선 후기의 재평가 등. 특히 한 시대를 풍미한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역사관은, 근대의 동력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이미 싹텄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왜 맹아 상태에 그치고 말았을까.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본격적으로 침탈하기 전에 그 맹아가 성숙해졌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러지 않았을까. 혹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이 질문에 충분히 대답하지 못하는 내재적 발전론은 그저 승리 서사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승리를 강변하려는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승리 서사가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패배 서사의 반작용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현대적 연구의 첫 단계는 일본 학자들이 주도했고, 그들의 연구 결과에는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토록 편향된 패배 서사에 반대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패배 서사를 거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승리 서사의 제창이었을까. 패배 판정을 거부하기 위해 승리를 선언하는 것은, 단순한 판정 번복이 아니라 상대가 제시한 승패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패배의 역사를 거부하고자 승리의 역사에 몰입하는 이는 여전히 승패에 집착한다. 그 승패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한, 근대(화)라는 것이 과연 그토록 염원할 만한 것이었는지 묻기 어렵다. 20세기에 풍미한 이러한 승리 서사는 그것을 촉발한 패배 서사만큼이나 우승열패(優勝劣敗)에 집착하는 사회진화론의 변종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어찌 전근대 한국 역사뿐이겠나. 나는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근현대 한국에 대한 서사들도 대개 승리 서사가 아니었나 의심한다. 많은 사람들이 근현대 한국 정치사의 자랑은 민주주의의 쟁취였다고 말한다.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의 문턱에서 거꾸러질 때, 혹은 왕정으로 복귀할 때, 혹은 독재가 창궐할 때, 한국인들은 거리에 나가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거듭되는 선거를 통해 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민주화를 마침내 실현했다. 혹은 실현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20세기 한국 정치사를 민주주의 쟁취의 승리 서사로(만) 쓸 때, 왜 시민들이 그토록 자주 거리에 나가야 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면, 굳이 생업을 제쳐두고 또다시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군부독재를 종식시켰다고 환호한 뒤에 군부 출신이 다시 집권하지 않았나. 촛불시위가 정권을 바꾸었다고 환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세력이 다시 집권하지 않았나. 그뿐이랴. 심지어 계엄이 수십 년 만에 다시 시도되지 않았나. 그것을 막기 위해 시민들은 재차 거리에 나가야 하지 않았나. 그러니 시민들이 거듭 거리에 나가 고성을 질러야 했던 역사는 민주주의의 거듭된 승리만큼이나 민주주의의 거듭된 좌절의 역사이기도 하다. 일상에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주의는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팝업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왜 그토록 자주 ‘거리’에 나가야 했을까
이것이 20세기 한국 정치사뿐이겠나. 경제사라고 얼마나 다르랴. 20세기 경제사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가 오랫동안 시달려온 기아(飢餓)의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이었다. 어디 기아의 위험을 뿌리 뽑는 정도에서 그쳤으랴.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끝내 중진국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21세기 한국은 기어이 경제적인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혹은 올라섰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20세기 한국 경제사를 경제발전의 승리 서사로(만) 쓸 때, 그 발전의 그늘에서 스러져간 많은 이들의 노고와 희생을 잊기 쉽다. 그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에 깊이 새겨진 상처와 광기를 외면하기 쉽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가 발전한 선진화의 길목에서 사람들이 왜 그토록 자살하는지 묻기 어렵다. 사람들이 줄지어 삶을 포기하는 마당에 도대체 발전이란 무엇이고 승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의심스럽기는 패배 서사도 마찬가지다. 누가 그렇게 깔끔하고 완전하게 패배한단 말인가. 현대 한국의 약진은 섣불리 덧씌워진 패배 서사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승리 서사와 패배 서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누군가에게 승리자의 영광을 주면 누군가는 패배자의 굴욕을 안게 된다. 그러니 승리 서사가 의심스럽다는 말은 패배 서사가 의심스럽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승열패의 프레임에 오래 중독되면, 자칫 강자 숭배에 물들기 쉽다.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칫 그 제국주의를 선망하기 쉽다. 그러한 강자 숭배의 극단에서 다름 아닌 유사 역사학이 창궐한다. 승리의 집착에는 패배의 상처가, 성공의 집착에는 실패의 아픔이, 풍요의 과시에는 결핍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패배와 실패와 결핍에 사로잡혀 있는 한, 승리와 성공과 풍요를 선망할 뿐, 그 목표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좀처럼 묻지 않게 된다.
나는 승리 서사가 미심쩍다. 내가 경험한 인생은 아이러니투성이였다. 승리가 승리를 낳지 않고, 패배가 패배를 낳지 않고, 승리가 패배를 낳고, 패배가 승리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성공이 성공을 낳지 않고, 실패가 실패를 낳지 않고, 성공이 실패를 낳고, 실패가 성공을 낳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말했다.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 경우보다는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고. 그것을 모르면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고. 엄청난 재난 뒤에는 반드시 지독한 악의가 도사리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순진무구한 천진함이 엄청난 재난을 부를 때도 적지 않다.
나는 승리 서사가 두렵다. 승리를 선언한 순간, 얼마 전까지 비틀거리던 세상이 갑자기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직후에 도래하는 승리에, 그 승리가 가져다주는 정상화에, 그 정상화가 약속하는 평화에 사람들은 도취되기 쉽다. 이것이 선망하던 승리로구나, 이것이 추구하던 정상이로구나, 이것이 기다리던 평화로구나. 그러나 이탈리아의 예술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말했다. 바로 그러한 승리의 상태, 정상의 상태, 평화로운 상태에서 우리의 눈이 멀기 시작한다고. 눈이 먼 나머지 주변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나머지 약자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잃게 된다고. 그래서 인간은 정상성 속에서 잠이 든다고. 마찬가지 취지에서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외면적 정상성보다 더 교활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일견 정상적인 상태 아래에서 실은 최악의 것들이 여전히 지나간다. 이를테면 정상적인 출근 아래에서 과도한 새벽배송이 지나간다.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생산 현장 아래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이 지나간다.
아직 승리를 선언하지 않을 때, 아직 정상화되었다고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부릅뜬 눈 아래서 악은 자신을 숨길 수 없고, 그만큼 악은 가시적이다. 충분히 가시적일 때, 악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한다. 저기 악이 나타났다! 모두가 인지하는 가시적인 악은 사람들을 결집한다. 결집한 사람들은 충만한 선의지를 가지고 그 명시적인 악을 타파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명시적인 악이 없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고양감을 느낀다. 그렇다. 명시적인 악은 이처럼 정신 건강에 좋다(?).
단순한 승패의 서사를 의심할 것
그러나 마침내 승리를 선언했을 때, 마침내 상황이 정상화되었다고 믿을 때, 우리는 악을 발견하기를 멈춘다. 그렇게 발견하기를 멈춘 눈 아래서 악은 자신을 숨기기 시작하고, 그만큼 악은 잠재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이 승리를 만끽하는 동안, 승리에 도취하는 바로 그때, 악은 비가시적이 되고, 그 비가시성은 악을 더욱 악화시킨다. 파시즘이 기승을 떨치던 20세기 전반 이탈리아. 마침내 파시스트들의 괴수 무솔리니를 처형하는 데 성공했을 때, 파졸리니는 오히려 근심했다.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더 어려운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신호가 아닌가. 뭔가 더 무시무시한 것이 다가오는 신호가 아닌가. 싸우기 어렵기에 뿌리 뽑기도 더 어려운 악이 퍼져나가는 징후가 아닌가. 명시적인 악은 물론 무섭지만 그만큼 싸우기 쉬운 법. 명시적인 만큼 저항의 대오를 결성하기 쉽고, 대오가 결성되면 악은 후퇴하기 시작하니까. 반면 암시적인 적은 잘 보이지 않기에 한층 싸우기 어려운 법. 암시적인 만큼 저항의 대오를 결성하기 어렵고, 대오를 결성하지 못하면 악은 전진하기 시작하니까. 그래서 암시적인 악은 명시적인 악보다 종종 더 무섭다.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애인 클라라 페타치의 훼손된 시체가 밀라노의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을 때, 그것은 파시즘을 뒤엎는 장대한 승리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러나 명시적인 악이 타파되는 그 화려한 스펙터클의 순간에, 암시적인 악들은 오히려 은은하게 사회 저변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파졸리니는, 무솔리니는 광장에 매달아버릴 수 있지만, 무솔리니를 가능케 한 저변은 매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파시즘의 수괴는 처형할 수 있지만 파시즘을 낳은 부패한 문화는 처형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이것저것 소비하고 마는 안온한 상태, 즉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버린 상태야말로 만연한 문제라고 파졸리니는 개탄했다.

파시즘뿐 아니라 파시즘을 가능케 한 저변에 주목하려면, 처형뿐 아니라 처형의 스펙터클 속에 가려지는 것들까지 주목하려면, 승리 서사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중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주인을 넘어뜨렸다고 해서 새삼 주인 자리를 넘보는 사람들도 아니다. 파졸리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인을 넘어뜨리기 위해 투쟁했지만 그렇다고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들지는 않았던” 이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승리 서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파시즘이라고 규정해야 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1년여 전의 계엄 시도가 한국 사회에 남긴 유무형의 상처와 부작용은 적지 않다. 그중 하나는, 정상성과 승리를 그 어느 때보다 만끽하기 쉬워졌다는 사실이다. 너무 명시적인 악의 존재로 인해, 그보다 조금만 덜 나빠도 승리하게 되는 세계, 아주 나쁜 것의 존재로 인해 그보다 덜 나쁜 모든 것들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세계, 최악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 그러한 세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패배의 서사만큼이나 승리의 서사도 의심하는 것이 좋다. 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화끈한 승리도 처절한 패배도 아닌, 꾸역꾸역 포복하는 삶이 2026년 한 해에도 이어질 것임을.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ditor@is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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